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소도 Mar 09. 2024

원수 같은 남편 "우리 00 아빠"

세상에서 가장 이질적인 연대

아이들 하원 후, 집 앞 빵집에 갔다. 집 앞의 체인 빵집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뽀로로빵을 판다. 가끔 한 번씩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들르는 곳이다. 


뽀로로빵 하나와 우유를 계산하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좀 더 공간이 분리된 안쪽에는 50대 중후반 정도의 아줌마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이 빵 까달라 저 빵 까달라. 한 놈은 빨대를 꽃아 줘도 흘리고, 다른 놈은 빨대 없이 먹겠다 성화대다 흘리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아줌마들의 큰 목청이 한몫을 더한다. 들으려는 의도도,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아줌마들의 이야기가 고막에 와 때려 박혔다.


"아유, 이번에 우리 00 아빠가 이래서 저랬는데 이랬다니까? 아주 지겨워 죽겠어"

"아유, 글쎄 우리 00 아빠는 이런다니까? 아주 못살아"

"아주 원수가 따로 없어요~"


[원수]와 [우리]가 이렇게 유의어였던가...? 원수의 사전적 의미는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으로 정의한다. 절대로 '우리'라는 단어와 한데 묶을 수 없는 뜻이기도 하다. 


대화의 맥락에 의하면 주된 주제는 남편의 흉이었다. 남편이 무슨 밉살스러운 짓을 했고, 말은 또 얼마나 얌통 맞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흐름 상으로는 예쁜 구석 하나 없는 바깥양반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남편이 원수일 수 있는 상황은 흔히 보았던 것이니,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싶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대화 내내 그 원수는 [우리] 00 아빠였다. 우리.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는 아줌마들의 대화 안에 두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아줌마들의 남편은 분명 원수와 같았을 거다. 남자가 가정보다 술만 좋아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원수 짓은 차고도 넘칠 테니까. 그러니 원수도 맞는 이야기지만 '우리'인 것도 맞을 것이다. 


지겹고 꼴 보기 싫지만 내 남편이자 내 아이의 '아빠'. 원수인 것도 맞고 때론 적군 같기도 하지만  우리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가끔은 남편이 아니라 시어머님 아들을 데려다 키우는 것 같은 '남자'. 없다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고 있다 해서 좋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평생의 약속을 나눈 '사람'.


세상에 이보다 이질적인 연대가 어디 있을까? 나는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저렇게 하나도 안무서운 엄포도 있구나' 싶었다. 


아줌마들이 카페에서 일어나 헤어져 집으로 돌아간 후의 시간이 그려졌다. 아줌마는 지겨워하지도 않고 정성스러운 저녁 밥상을 차려냈을 것이다. 그날 저녁도 못살지 않고 집안 가득 두 사람의 온기를 채웠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갈 것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날 저녁, 나는 평소보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저녁을 차릴 수 있었다. 지겹고 안온한 하루가 조금 색다르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세상에서 가장 정 깊은 흉 덕분에.

작가의 이전글 영알못이 뉴욕에서 본 라이온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