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청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지방에 사는 2등 인간? '지잡'으로 불리는 청년들
[대선기획-100인의 편지 32] '지방 청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2017년 4월 28일 오마이뉴스 기고
이시훈(영남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변두리는 빛이 들지 않는 곳이다. 그곳은 권력을 잃고 언어를 잃고 타자화 당하고 멸시받는 이들의 공간이다. 우리 시대의 변두리는 어디인가? 그리고 우리는 변두리에 어떻게 다시 '권력'을 '활기'를 '목소리'를 부여할 것인가? 이는 유사 이래 정치에 부과되는 숙명 같은 것이다.
누구에게, 어디에게 권력을 주고 공간과 세계, 권력과 자원을 어떻게 분할하고 분배할 것인가? 이 정치의 결정에 따라 누군가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누군가의 목소리는 커진다. 그렇기에 변두리와 중앙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관계이다.
이는 다른 의미로 처음부터 주어진 중앙과 변두리 관계는 없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 변두리와 중앙의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구축되었는지를 추적하여 재구축할 수 있음을 동시에 뜻한다. 우리가 적어도 최소한 지난 촛불에서 그토록 갈구했던 최소한의 참된 민주-공화국에 살고자 한다면 내부 식민지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만들어진 변두리'들은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법적 평등과 동등, 부당한 차별과 착취에 대한 정치적 정의의 관점에도 부합하는 길이다.
만들어진 제국, 만들어진 식민지
벌써 10년이 되어 가는 헌법재판소의 어느 결정을 생각해본다. 참여정부가 수행한 가장 큰 혁신적 시도였던 행정수도 이전을 좌초시킨 그것은 이 거대한 중심이 얼마나 작위적이고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보여준다. 그 결정은 서울이라는 우리 시대의 중심은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편 우리의 관습과 의식, 규범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와 구조 속에서 변하고 운동한다. 결국 서울이라는 이 거대한 제국의 중심은 정치적 선택과 권력과 권력 간의 협력과 합의, 투쟁의 결과이다.
보수적 법관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기 위해 관습헌법이라는 초헌법적 표현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좌초시켰다. 그들은 그저 서울 사람들이 서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과 그들이 향유하는 재화와 자원들을 지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들의 시선은 서울을 위해 세운 송전탑에 땅을 빼앗긴 농민들과 그들의 전기를 위해 일상적으로 원전의 불온한 회색 방호벽을 보는 지역의 사람들에게 닿지 않는다. 사실 그들의 정의는 이 나라 전체 대중과 공공의 정의라기보단 지극히 서울이라는 이 중심부 기득권을 위한 정의였다.
하지만 그들은 관습헌법에 따라 수도가 서울이라는 논리를 내놓으며, 서울이 사실 어떤 경제적 효용이나 필연성과 같은 내적인 이유로 중심의 위치를 획득한 곳이 아님을 스스로 폭로했다. 이렇듯 서울은 오로지 그곳이 이 나라의 수도이자 중심이라는 일련의 관습적 사고를 통해 지지되고 정당화 되고 있었다.
이는 다른 의미로 이 나라의 수도가 ,권력과 자본의 중심이 서울이 아닐 수 있음을 증명한다. 단지 그 어떤 의식과 편견만이 서울을 정당화하고 있다. 결국 변두리만 아니라 중심도 구성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한편 중심의 존재 양식 역시 새롭게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중심과 변두리의 관계의 내용과 양식 역시 의식과 실제의 변화를 위한 투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충남 일대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연기를 뿜어내는 화력발전소 전기의 최종 종착지가 어디일까? 노량진과 신림의 열악한 주거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청년 다수는 어디서 온 이들일까?
일자리는 없고, '지방거점 국립대학'의 위상은 떨어지고...
서울은 우리 시대의 원더랜드다. 그곳은 또 우리 시대의 블랙홀이다. 동시에 서울은 메트로폴리탄이며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지상천국이며 이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은 그 변두리들의 사람과 자원, 땅과 에너지, 노동을 수탈하여 유지되는 곳이다. 서울은 이처럼 변두리들을 식민화하여 착취하지 않고는 지탱되지 않지만 정작 서울은 변두리들을 멸시하고 타자화 시킨다.
'촌'이라는 지칭은 어느새 더욱 분명하게 후진적이고 낡고 오래되고 구린 '서울 바깥'에 대한 멸시의 언어가 되었고, 사투리는 어느새 가난하고 천박하고 교양없고 동시에 웃긴 말이 되어 희극과 오락 프로그램에서 조롱거리로 쓰이고 있다. 심지어 많은 이들에게 대구나 광주는 도쿄나 베이징보다 심리적 거리가 먼 곳이 되었다. 그나마 부산은 해운대와 광안리 때문이라도 촌 취급은 면하는 듯 보인다.
이 지역 산업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수도권이나 동남아시아로 옮겨가는 만큼 이 변두리에서 수도권 중심부로의 엑소더스(Exodus)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기존의 일자리를 따라 서울과 그 인접 지역으로 옮겨 가야 했고, 청년층은 그나마 있었던 양질의 일자리들이 사라짐에 따라 그래도 좀 더 기회가 있어 보이는 서울로 옮겨 갔다. 이 지역에서 할 수 있는 건 공무원이 되거나 아니면 저임금 하청기업 노동자나 서비스직 노동자가 되는 것 뿐이다. 개중에 일부는 울산의 조선이나 자동차, 부산의 선박 부품과 해운 등으로 나가기도 했지만 최근 조선과 해운의 급격한 쇠락은 이제 이 탈출의 흐름을 더욱 분명하게 서울로 향하게 했다.
한편 다수의 서비스업과 소매업 역시 중앙의 지배하에 잠식되어 갔다. 백화점-대형마트-SSM-편의점으로 이어지는 소매시장 지배 체계는 지역의 구매력들을 빠르게 중앙으로 가져갔다. 이런 중앙 중심의 소매시장은 지역에 유의미한 경제적 기여를 전혀 만들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지역 내부에서의 자본 증식은 이뤄지지 못했고, 지방에 남은 다소간의 하청 기업이나 서비스업을 통해 얻어진 구매력은 도소매 지배 체제를 통해 다수가 중앙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지역에 만들어진 부가가치라고는 고작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상징하는 마트 캐셔와 판촉사원, 편의점 알바와 같은 직업들 뿐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변두리 지역들은 아주 상징적이고 급격한 유출에 노출된 곳부터 느리게 죽어가고 있다. 전지구적인 생산네트워크의 유연화와 재배치, 자본 축적 형태의 금융화와 전산화, 대기업의 소매업 지배는 이제 더욱 분명하게 지역의 위상과 가치를 해체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은 이런 급격한 쇠락과 이탈을 설명하는 데 있어 아주 좋은 사례다.
대구지역의 유력 국립대를 다녔던 00학번과 12학번의 사촌 형제들은 그 대학에 간다는 것에 대해 전혀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이 상이한 반응은 이 12년 사이의 중앙과 변두리 관계에서 일어난 변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쉽게 읽어 내도록 해준다. 이른바 지방거점 국립대학은 과거 수도권의 주요 대학들과 대학 서열을 다투었지만 서울-지방 관계와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 속에서 한국의 대학 서열 구조가 이중적 구조(1부 리그인 서울권과 2부 리그인 지방)로 재편되면서 결국 제아무리 지방의 거점 국립대학을 간다고 해도 그래봐야 '촌 지방에서 잘난' 대학이 될 뿐인 것이었다.
'지잡대'라는 멸칭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변두리가 한층 더 식민화되고 동시에 타자화 됨을 보여준다. 결국 과거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의 식민지 내부 엘리트들이 국내 제대와 민립대학에서 제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아도 근본적으로 그들이 식민지 2등 신민들의 엘리트이듯이 더 이상 경북대나 부산대와 같이 과거 한국의 학벌 계서(階序)에서 높은 위치에 있던 대학을 간다 한들 결국은 '지잡' 내부의 엘리트일 뿐이다.
결국 같은 '대학'이라는 학력을 가진다 해도 그들만의 대학 리그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며 내부 식민지는 격리된 공간 내에서 위치하여 대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구별과 구분, 배제의 기제들은 지방을 타자화된 변두리와 사회경제적 탈취를 넘어 명실상부하게 스스로를 무능하고 실패한 2등 인간으로 사고하게끔 만들었다.
재경유능 재향무능(在京有能 在鄕無能)의 고정관념
이 식민지 같은 2등 동네에도 삶이 이어지고 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전통적인 사고 속에서도 지역에 남은 혹은 떠나지 못한 이들이 있다. 그들 다수는 학업이나 직업을 위해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잡'이라는 멸칭 아래 묶여 있는 이들이며 단지 자신의 고향 내지 인근의 지역에 남아있거나 떠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원과 정보, (문화, 경제, 사회, 인적)자본의 네트워크에 배제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에 남은 청년들은 우리 사회와 권력에 기입되지 못한 이들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점증되어 가는 세대 간 투쟁의 한 축이지만 동시에는 수도권-비수도권 구도가 만들어내는 학벌과 직업, 삶의 경제적 문화적 자산의 균열의 한 축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노년층 다음으로 불안정하고 동시에 사회 최말단에 놓여 있는 이들이다. 실제 SNS와 서울 지역 고학력 청년 또래 집단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반 가부장, 페미니즘, 젠더 담론들이 실제 저학력, 지방 청년 또래에 얼마나 유의미하게 확산되고 있는지에 대해 냉철하게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서울 중심주의적 의식/무의식은 의외로 많은 곳들에 존재하며 의도적/비의도적으로 지방과 지방의 청년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지방에 있음'의 문제를 구성되고 배치된 권력의 결과라기 보단 능력의 문제로 환원하여 이해하고 있다. 즉 '지잡'의 삶을 사는 것이 결국 그들의 무능의 탓이라는 것이다. 결국 수능을 못쳐서,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부모를, 지방에 사는 부모를 만났다는 이유로, 스펙을 많이 또 높게 쌓지 못했기에 그들은 이 서울 바깥의 변두리에 있다고, 중앙에 있는 이들은 그렇게 정당화하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권력 있고 언어 가진 이들의 논리는 어느새 변두리의 주체들의 의식/무의식 속에 내면화 되어 있다.
하지만 서울의 존재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선택되고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서울과 지방의 문제를 단순히 왜곡되고 천박한 능력주의만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은 논리와 현상의 실제 사이에서 설득력과 정합성을 가지지도 못한다. 게다가 이미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못한 이 구조를 은폐하고 왜곡하며 동시에 이 구조의 기득권에 편승하는 논리일 뿐이다.
이 천박하고 왜곡된 실력주의가 만들어낸 질서 속에 지방의 청년들은 한편으론 박탈되고 배제되고 소외되면서도 이 실력주의 내에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나마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게,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다 믿는 공무원이 되기 위해 그들은 노량진으로 그리고 지역의 공시촌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겐 그들이 처한 이 정치적이고 동시에 역사적인 상황과 맥락에 대해 사고할 물리적 발판이 없다. 그들에겐 오로지 지금 이대로 떨어지느냐 아니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고 버티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갈 뿐이다. 한국의 학벌주의 타파 운동이 정작 학벌주의의 상단에 있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는 아이러니는 우리에게 많은 숙고의 거리들을 던져준다.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정치
'학습과 모방을 통한 따라잡기에서 구별짓기와 이중구조로의 분리'
더 이상 지방과 서울의 문제는 동등한 하나의 리그 내에서 벌어지는 모방과 학습을 통한 따라잡기 게임이 아니다. 저명한 정치경제학자 앨리스 암스덴이 한국 경제의 압축적 공업화를 설명한 이 경구는 사실 일정 부분 서울과 지방의 관계에서도 오랜 시간 적용돼 왔다. 가부장적이고 병영주의적인 국가의 풍토 속에서 지방은 마치 똑똑한 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희생한 큰 누나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그렇게 대학에 보내 동생이 성공하면 어느정도 큰 누나가 그 사회경제적 성공에 편승하고 일정한 적하효과가 있으리라 믿었던 그 시절의 논리가 지방과 서울 사이에도 통용됐다.
학부와 대학원의 존경하는 은사이신 김태일 교수님이 1990년대 영남대에 처음 오셨을 때 학생운동을 하던 내 선배들의 표정을 보며, 나름 악전고투 하던 서울과 다르다 느끼셔서 그 차이를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저희가 2년 늦심더"였다.
이 말은 우리의 서울-지방 관계의 과거 모습을 많이도 설명한다. 서울과 지방은 서로 물자와 인력을 교류하며 서로가 서로를 끌고 견인해갔다. 하지만 이제 지방과 서울은 동등한 리그 속에 있지 않다. 이 나라 내부를 둘러산 권력과 축적 양식의 변화는 지방을 자신들을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한 큰 누나 보다는 무능하고 가난한 내부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금 서울에 있다는 그 자체로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 서울과 그 안에 살아가는 이들의 잘남의 결과가 아님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무수한 지역의 희생과 강요된 양보의 결과이며 지역이 마땅히 향유했어야 했던 것에 대한 유보의 결과이다. 모든 것이 집중되고 집적된 결과 수도권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과밀화된 공간이 되어 지방과는 또 다른 의미의 고통의 공간이 되었다. 우리 시대는 이제 이렇게 왜곡된 공간적 질서들을 다시 배치하고 구성해야 한다.
분권이 중요한 정치적 기획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사실 더 필요한 것은 단순히 지방자치를 강화하는 것만 아니라 공간과 공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권력을 새로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는 그런 것들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고 그 배분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 우리는 이제 20세기의 '선택과 집중'이 만들어낸 왜곡된 공간 질서를 해체시켜야 한다.
연장된 20세기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변곡점으로 최근의 정치 일정에서 다시 한번 지방의 문제가 논의되고 숙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고려의 대상은 '청년'과 '지방'이라는 두 화두가 중첩되는 지방 사는 청년들의 '미래'에 있어야 한다. 권력도, 목소리도, 일자리도, 풍부한 삶의 환경도 없는 공간에는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지방청년들에게 이런 식의 희생과 양보, 배제와 소외를 강요하고 전가하는 세계에 정의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정부는 과거로부터 축적된 이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쌓아가야 한다. 퇴락한 서울 제국주의에서 빛 잃고 목소리 잃은 이들을 위해 의식과 규범, 관습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