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쇠락의 정치학
만들어진 2부 리그
지방대 쇠락의 정치학
이시훈
0.
지금 대학은 느리지만 분명하게 죽어가고 있다. 대학에는 배움과 탐구, 인간 본원의 자유와 불가능해 보이는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했던 거대한 사회적 열정과 의지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때 해방구이자 자유과 민주의 요람, 혁명의 산파였던 대학은 이제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안정되고 좋은 자리에 학생들을 내보기 위한 욕망과 생존의 문법에 포획당했다. 불안정하고 유동하는 사회에서 과거와 같이 대학의 존재는 어떤 견고한 지지판의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 지금의 대학은 거대한 생존의 공간이다. 우리가 가진 전통적 관념으로 대학은 사라진 채 받아쓰기 기술자와 밤샘 기술자, 문제풀이 기술자만이 자라나는 학습소만 남았다. 대학의 가치와 존재 이유, 소명은 이제 수월성과 돈, 성과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우리가 알던 대학은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신과 신앙의 세계에서 인간 스스로의 이성과 오성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규명하려던 중세 대학의 몰락 이후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대학은 다시 호출된다. 그렇게 재건된 대학의 존재는 국가 체제 내에서 지배 엘리트와 중간층의 생산과 교육이라는 핵심적 역할을 소화하며 국가기구와 비슷한 제도적 지위를 가지면서도 상당한 자율성과 정치적, 사회적 자유를 향유하는 특권적 제도이자 공간으로 기능했다. 이런 근대 대학의 존재는 제3세계의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반독재 체제의 근거지였으며,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탈물질주의-탈권위주의, 반전 등의 운동과 새로운 문화적 양식을 낳는 산실이었다.
그런 빛나던 과거는 어느새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회의, 자조로 바뀌고 있다. 자기 전공에 대한 공부는 해당 전공이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보다는 취업에 더 유리한 전공 여부와 가장 기본 스펙인 학점을 위한 것이고, 그나마도 인문사회 계열은 그 학점조차도 ‘학점 인플레’ ‘문돌이’ 등으로 폄훼당하며 불신받고 있다. 살인적인 등록금과 생활비는 이 생활 자체를 영위하고 이어가기 위한 불안정 노동을 요구하고 강제하고 있으며, 장학금은 어느새 학문과 배움에 대한 장려가 아닌 우수 학생들을 유치/유지하기 위한 ‘대학의 생존 전략’으로 전락했다. 삶과 세계에 대한 비판과 성찰, 질문과 상상이 상실된 대학에 남은 것은 거대한 먹고사니즘과 생존주의의 논리다. 학생부터 교수와 교직원, 대학 제도 전반에 서려 있는 논리는 어떤 의미로 가장 퇴락한 현실주의에 다름아니다. 이 퇴락한 현실주의는 꿈과 희망, 상상력과 열정의 안온한 보호구역이던 대학을 죽였다. 꿈과 이상은 경멸당했으며, 열정은 어느새 자본의 착취와 탈취를 포장하는 옷감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아직 대학에 남아 있는 오래된 아카데미즘의 망령들이 이에 대해 비판하고 반발하고 저항하며 ‘자유롭고 살아 있는 대학’을 말하지만 이 죽음의 추세를 되돌리기엔 중과부적이다. 대학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임계점을 향하여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 죽음의 속도가 무척 상대적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사멸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의 존재는 우리에게 공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간의 흐름은 누군가에게 지연되고 유보되는 데 비해 누군가에겐 그 죽음의 속도는 훨씬 빠르게 흐르고 있다. 마치 하나의 차원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양자는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른 몇 개의 차원을 사이에 둔 듯하다. 본질적으로 죽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왜 죽음을 향하는 시간의 속도가 상대성을 가지는지는 분명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이다. 정녕 그들은 다른 시간의 차원 속에 놓여 있는 것일까?
1.
해방 이후에서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는 군부와 학생, 그중에서도 대학생 사이의 투쟁의 역사였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적인 교육과 기술, 의식, 사고, 인식을 얻은 집단이었다. 대학은 민립대학 운동, 자강운동, 근대적 국민국가, 민주국가 만들기를 위한 담론과 실천의 요람이었다. 60년 4월의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연 역사의 길을 그들의 후예들은 묵묵히 걸었고, 80년 5월을 거쳐 체제에 대한 변혁이라는 역사적 소명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급진적인 운동을 하는 주체일 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근대적인 사고와 인식이 자라나는 뿌리였으며, 한국의 독특한 발전국가(Development State)를 지탱하는 기술관료와 기업의 중간 관리자, 기술자층의 근간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새로운 이론과 담론의 수용자였고 이를 확산하는 계몽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대학생들의 역할과 실천 속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사회 운동들이 자라났다. 만약 한국에서 대학의 존재의미와 기반이 허술했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지금 우리가 겪는 시공간과 다른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현대사는 대학과 그곳을 거치는 이들이 군의 근대성과 경합하며 국가와 정부, 자본과 개별 기업, 갓 자라나기 시작한 시민사회와 여러 문화, 지식 하부구조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의 역사이다.
대학은 이 50년의 싸움에서 군이 표상하는 질서와 근대와의 경합에서 승리했지만 최종적 승리를 획득하지 못한 채 역사의 주체에서 탈각되어버렸다. 대학은 더 이상 새로운 사회적 흐름을 열지 못하고 있으며, 과거 대학생의 정체성으로 역사를 열던 이들은 다른 옷을 입고 도리어 대학을 옥죄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학다움, 대학스러움은 과거 세대의 향수 속에서만 존재하며 대학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에서 선진적이고 전위적인 하위집단을 형성하고 있지도 못한다.
비록 현재의 대학과 대학생이 과거처럼 빛나는 역사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대학과 대학생이라는 주체, 공간, 제도, 문화와 의식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다른 의미와 내용, 맥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과 대학생을 둘러싼 관계들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 현대사의 역학 관계와 구조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접근은 기존의 제도 정치 중심의 접근과 차별되는 시각을 제공해준다.
2.
서울은 특별한 곳이다. 그곳은 한국 사회에서 소수의 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문에서 강력한 표준 권력을 행사하고, 이 표준에 어긋나는 것들을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권력을 가진 곳이다. 서울은 존엄한 곳이다. 우리는 이 서울의 존엄을 위해 서울 아닌 곳들의 일자리, 청년과 생명, 구매력을 싹 쓸어 담아 서울로 이전한다. 서울은 반짝반짝 빛나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아름답다. FM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올림픽대로의 실황을 들으며 한강변의 야경과 그 체증을 연상하는 내 몸은, 정작 대구의 담티 고개나 부산의 대티 언덕을 넘어서고 있다. 서울은 찬란하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기술의 파라다이스, 21세기 하이 모던의 공간, 메트로폴리탄 그 자체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서울과 지방 사이에 이런 차이가 만들어졌는지 묻지 않는다. 오롯이 서울을 동경하고 질투하고 사랑하며 증오하는 서울앓이를 할 뿐이다.
서울의 빛남과 잘남, 화려함을 설명하는 대전제는 서울이란 땅이 지정, 지경학적으로 타 지역에 비해 월등하지만은 않으며 동시에 서울 사람들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이래 가장 지적으로 탁월하다든가 가장 성실하고 노력했기 때문만은 아니란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한강을 장악하면 한반도의 지배자가 된다고 교과서는 설파하지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입된 이런 미신과 신화, 당위를 걷어내고 서울과 지방 사이의 진짜 관계를 드러내는 역사적 단초를 찾는 일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1960~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는 신기한 클리셰가 숨어 있다. 이 전형적이고 뻔한 이야기의 핵심은 경제 성장과 공업화 단계에서 가족 전체의 풍요를 위해 누가 기회와 자원에 접근하고 누가 희생하여 이를 뒷받침하는지에 있다. 가난한 일족을 일으키기 위해 똑똑한 장남에게 모든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자원과 자산을 집중시키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그의 여형제들이 어린 나이에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으로 가던 이런 개발 시대의 서사는 놀랍도록 서울과 지방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었다. 물론 여기서 실제 그 장남이 장녀 혹은 다른 누군가보다 명석하고 지적으로 뛰어난지는 불명이다. 가부장적 권력의 상속자로 적장자 남성이 선택받듯이 서울이 이 부(富)를 분배하고 배치할 권력에게 선택받은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드라마의 결말이 해피엔딩인 경우는 무척 드물다. 하지만 누이들의 희생과 헌신, 양보로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둔 맏이(그가 의사이건 변호사이건 구체적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의 부와 성공이 그의 누이와 그들의 가족들에게 이양되고 분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히려 적지 않은 집에서는 누군가의 좌절과 희생이 이에 대비되며 내부에서의 갈등을 만들었다.
서울 역시 그런 선택과 집중의 산물이다. 동시에 서울은 그 선택과 집중을 결정하는 권력의 소재지였다. 한반도에 일본에서와 비슷한 근대를 구축하려 하던 식민지 총독부 권력이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 당시에 어떤 의미였을까? 이전의 왕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과 근대적인 행정 지배 체계의 중심으로 서울, 근대적인 문물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기회가 가장 먼저 닿는 공간으로서의 서울이 어떤 의미였을까를 상상해보자.
이후 군부 권위주의 하에서도 서울은 영남권 해안 도시들과 더불어 불균등 성장 체제의 수혜자였다. 서울은 한국 대부분의 대기업들의 본사가 소재했고, 그들이 이 압축적인 성장기에 몸을 불리는 동안 같이 살을 찌워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서울 아닌 곳들, 이 식민지에 이은 군부 반공 권위주의 발전국가 체제에서 수혜받지 못한 지역들은 ‘우리 모두’ 더 잘 살기 위하여 향유해야 할 것들을 양보하고 희생하고 유예 당해야 했고, 농산물 가격 통제나 청년 유출을 겪어야 했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하고 환란을 극복해도 서울은 자신들에게 편중된 이 성공과 부를 나누려 하지 않았고, 도리어 지방을 타자화하고 식민화했다. 지방의 소매 사업은 편의점과 SSM, 대형마트, 백화점의 저인망식 소매 산업에 그 자리를 빼앗겼고, 지방의 공장들은 서울에 소재한 재벌들의 하청공장으로 전락했다. 자연히 이들은 서울의 필요와 글로벌 경쟁과 지구적 생산 체인의 변화에 따라 그 생사가 나뉘어야 했다. 지방이 이렇게 빈궁해질수록 청년들의 탈 지방은 심화되었고, 이런 이중적인 내부 약탈 구조는 이제 지방의 생명마저 서울의 활기를 위해 탈취하는 구조로 나아갔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정보화, 금융화, 자동화됨에 따라 서울로의 집적과 약탈은 심화되었다. 한때 경북 내륙에 젖과 꿀이 흐르게 했던(낙동강을 화학물질의 바다로도 만들었다) 구미의 전자 산업들은 21세기에 들어 경쟁적으로 서울 근교의 천안과 평택, 파주, 용인 일대로 재배치되었다. 노동 시장의 유연화는 이런 경향과 맞물려 지방의 일자리가 3, 4차 하청 공장의 단순 비숙련 노동이나 프랜차이즈란 이름으로 위장된 서울의 소매산업 지배 구조의 말단에 선 불안정 여성 노동에 대체되도록 했다. 지방에는 더 이상 우리가 전통적으로 인식해온 ‘양질의 일자리’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자연히 지방 청년들의 소망은 공무원이나 공공부문에 취업하거나 대기업에 취직하여 서울이나 지경학적 필연성으로 서울로 집적되지 않은 울산, 창원, 부산 등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도리어 지방의 노령화와 활력의 저하, 문화적 퇴행과 폐쇄성을 유발했다.
이 약탈적인 식민 구조는 그들의 희생으로 큰 장남의 자식들이 그들의 부와 영광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한, 상대적으로 덜 세련되고 가난한 고모들의 자식을 촌스럽고 가난하다 혐오하고 경원시하는데 이르렀다. 지역의 사투리들은 표준어 지배 권력에 밀려 촌스러운 것으로 전락했고 유머의 소재로 전락했다. 모두가 그 와중에도 서울 따라잡기, 서울 배우기, 서울 흉내 내기에 급급했다. 한편으론 균형발전이니 분권을 말하지만 정작 지방 정부가 권능과 자원을 더 행사한다고 이 내부 식민 구조가 변화하는지는 미지수였다. 물론 그나마도 자신들의 부동산 가치와 미래 수익을 위해 내놓길 거부하는 이들의 반발(관습헌법의 관습이 어디서 나온지 생각하자)에 좌초하기 일쑤였다. 어느새 자신들을 살찌우고 번영으로 이끈 선택과 이를 위해 감내한 양보와 희생의 기억은 마멸되고 과정으로의 불균등이 아닌 그 결과의 불균등만이 의식에 남아버렸다. 그렇게 이 내부 식민지와 서울 제국의 구조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되었다.
3.
인류학자 김현경은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학벌주의라 불리는 권력 현상/의식을 크게 학력주의와 연고주의, 서열화로 구별해 설명했다. 학력주의는 말 그대로 대학의 진학 및 졸업 여부를 통해 얻는 사회적인 기회와 권력 자원들의 문제를 지칭하며 오랫동안 학벌차별으로 지시되던 의식이다. 그러나 김현경은 이 글을 통해 대학 설립 준칙주의와 졸업정원제 폐지 이후 사실상 전통적으로 학벌을 상징하던 학력주의의 위력이 감쇠하고 연고주의와 서열화의 의미가 강화됨을 지적했다.
오랜 시간 한국 사회에서 대학 문제는 학력 차별과 서열화에 있었다. 연고주의란 것이 다양한 매개를 통해 한국 사회에 비교적 폭넓게 확산되어 있고 이에 대한 관용도 역시 큰 편이었고 지역 연고라는 더 강한 매개 고리가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학력주의가 사실상 붕괴한 상황에서 학벌주의 문제는 사실상 대학을 서열화하고 어느 대학에 다니느냐를 잣대로 사람을 나누는 서열화의 문제로 대체되었다.
대입은 늘 전국의 수험생들을 한 줄로 세웠고, 좋은 대학이 사실상 우선적으로 그들을 데려갈 자격을 가졌다. 물론 더 좋은 대학은 어떤 명시적 선언으로 규정되지 않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학 간 다툼과 경쟁의 결과도 아니었다. 더 좋은 그곳은 오로지 우리의 마음에서 결정되었다. 이 암묵적인 순위와 서열은 우리가 마음으로 수긍하고 따르는 순간 권력이 되는 그런 것이었다.
서열화는 늘 존재했다. 선택에 있어 어느 것이 더 좋은가는 아마 인류사적인 물음일 것이다. 사실 학벌뿐 아니라 많은 것들이 특정한 잣대로 평가되고 배치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은 늘 이를 정당화했다. 약육강식, 우승열패 등 이 서열을 정당화하는 신화들은 우리의 이데올로기 깊숙이 존재했고 작동했다. 교육은 한국인들의 입신양명과 출세, 성공이라는 가장 강력한 욕망이 투영되고 있기에 ‘좀 더 나은 곳’, ‘좀 더 잘 될 수 있는 곳’에 대한 열망과 평가는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식민지와 전쟁, 압축적인 공업화는 늘 실력주의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전통적 지주-사대부 지배 체제의 해체 속에서 당시의 사회는 새로운 엘리트 상을 만들지 못했고, 이 권력의 공백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인정받는 잣대는 공부였다. 공부를 잘해야만 잘 살 수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엘리트 상의 공백 속에서 정승의 아들이 하찮은 건달이 되기도 했고, 머슴의 아들이 고등고시를 붙는 이야기는 흔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실력주의 신화의 핵심에 바로 공부가 있었다. 자연히 대학 진학률이 낮은 시대에 대학에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엘리트 후보생이자 사회적 성공을 의미했고, 좀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입시 결과들이 학교들을 평가하고 줄세웠다.
하지만 이 실력주의 신화와 이로부터 파생되는 서열화는 시대의 주‧객관적 조건과 내용이 변화함에도 비판적으로 성찰되지 못한 채 퇴락한 형태로 재생산되었다. 이에 실력주의 신화와 서열 질서는 퇴락한 형식으로 후속 세대와 그 부모들의 욕망과 조응하고 있다. 과거에 대학을 가느냐 아니냐. 고교를 어디로 가느냐가 그랬다면 지금은 취업에 유망한 학과 혹은 취업에 선호하는 여부에 따라 대학과 학과들이 줄 세워졌다.
청년 세대에서 지방이 낙오와 못남, 실패와 탈락의 이미지를 갖는 뿌리는 이 서열화에 있다. 특히 외환위기로 인해 들어선 한국의 신자유주의-포스트 발전국가 체제는 노동시장을 극도로 다층화시켰고, 과거의 “대학 졸업-좋은 일자리”라는 연계 고리를 무너트렸다. 유연하고 불안정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에서 내부 경쟁은 계속 심해졌고, 대학 졸업만으로 양질의 안정적 일자리 진입이 힘들어지며 대학 간의 서열 경쟁 역시 심화되었다. 어느새 과거 대학이 누리던 변형된 지대효과는 서울의 일부 대학, 그 가운데서도 일부 학과들에만 돌아갔다.
이런 흐름에서 가장 치명적으로 탈락의 피해를 감내한 것은 과거 실력주의 신화시대의 한 축인 지방의 거점 국립대와 지방 명문 사학들이었다. 이 대학들에서 제공하는 강의의 질이 좋으냐, 교수진의 역량이 어떠한가는 부차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계서의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것만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주며 열등한 타자와 자신을 구별해주고 더 나은 미래에 접근할 기회와 자격을 부여해준다. 대학의 야구점퍼에 자신의 학교와 학과를 기재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출신 고등학교까지 기재하는 세태는 일견 연고주의적 전략 같지만, 사실 이는 서열화가 낳은 현상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비교적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증명하고 타자를 차별하는 방법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이만큼 자명하고 간단히 내가 어떤 사람이고 너와 어떻게 다른지 증명하는 방법이 있던가? 실력주의 신화가 만든 이 서열은 이제 노동 시장의 구조/서울과 지방의 제국-식민지 구조에 편승하여 타락한 형식으로 발현하고 있다.
97년 체제 아래 대학의 변화는 급격한 신자유주의적인 노동, 사회 구조의 전환과 더불어 곳곳에 편재되고 우리의 맘과 의식, ‘서열 짓기’가 조응한 결과다. 그리고 이 조응을 바로 과거의 실력주의와 공부의 신화가 지탱하고 있다. 우승열패의 내용은 이제 대학/비 대학에서 서울의 좋은 대학/지방대의 구조로 변화했다. 물론 이 조응 관계 사이에는 분절적이고 모호한 위칫값을 가진 중간 공간들이 존재한다. 서울에 있으나 서울 내부에서도 2등으로, 실패로 취급받는 그런 대학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중간지대의 존재가 사태의 본질을 변화시키진 않는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대학이 ‘명문’과 ‘지잡’으로 양분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잡’을 만들고 선언하는 서열짓기에 대한 논급이기 때문이다.
4.
재경유능, 재향무능의 시대에서 서울 아닌 곳에 있는 이들은 어떤 태도로 살아갈까? 서울이 잘남과 미덕, 훌륭함, 높은 성공 가능성 등을 상징하게 되고 이로써 서울이 서울 아닌 곳들의 젊음과 활기마저 잃어가는 시대에서 무능과 못남, 열패의 위치에 놓인 재향 청년들에겐 몇 가지 독특한 의식의 조류가 나타나게 된다. 이를 살펴볼 때 크게 “탈 지방”, “서울병”, “재향 나르시스트”, “혁명가”라는 네 범주로 나눠 이들을 설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탈 지방”은 실력주의 신화의 현신이다. 이 중에 으뜸은 역시 지방에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겠지만 이왕 지방에 태어난 이상 고등교육을 서울로 받으러 유학 가는 것이다. 그렇게 서울에 가서 서울의 온갖 XX푸어들의 일원이 되는 한이 있어도 지방에 있는 것보단 괜찮은 삶을 누릴 수 있다. 역시 희망은 지방을 떠나는 것이다. 거기서 잘되면 혹시라도 제주도나 강릉 같은 서울이 사랑하는 지방, 서울의 시선에서 조직되고 소비되는 지방에서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들 다수는 서울 사회의 활력을 공급하고 동시에 서울 제국을 재생산하고 지탱하는 존재들이다. 이들 가운데 간헐적으로 나오는 ‘신화적 삶’들은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이데올로기를 현대적으로 변주하는 좋은 재료들이다.
이에 반해 “서울병”의 유형은 실력주의 신화에 충실하지 못해 서울로 올라가지 못한 이들이다. 이들은 무척 흥미로운 범주인데, 이들에게선 서울 제국주의, 서울 중심주의에 대한 충실한 추종과 실력주의의 불공정함에 대한 자기연민에 가까운 분노, 서울에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 등 분열적이고 복합적인 감정과 의식이 목격된다는 것이다. 이들 중 ‘탈 지방’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앞서 ‘IN 서울’에 성공한 훌륭한 선배들처럼 ‘탈 지방’하기를 소망한다. 개중에 일부는 ‘탈 지역’에 성공하지만 대개는 지역의 서비스, 소비 산업의 중추가 되거나 하층 공무원 집단에 편입되어 이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살아가게 된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문제를 개별적인 지방의 낙후함과 못남의 문제로 치부하며 문제의 해결로 서울로의 탈출 혹은 서울 스타일의 수용, 지방의 서울화를 지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혁명가”의 부류는 자기의식과 내면에서 ‘탈 제국’을 이뤄낸 이들이다. 이들은 적어도 서울이 만들어내고 유포하는 정상 생활의 기준에서는 제정신이 아닌 자들이다. 이들은 결국 제국 바깥, 변두리, 식민지에 있으면서 이를 통해 중심부가 만들어내는 부조리와 모순을 직시한 이들이다. 결국 본질적으로 이들은 혁명가들이며 가려지고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고발하는 이들이다. 마치 에드워드 사이드가 팔레스티나로, 서경식이 재일 조선인 디아스포라로 있음으로 그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하고 그것을 드러내고 바꾸려 하듯이 이들은 저 제국에 편승하지 않고 지방에서 그것을 드러내고 싸우는 것을 자존으로 하는 이상한 자들이다. 이들은 우리 시대의 불령선인들임에도 진보좌파의 주류는 아니다. 진보좌파들마저도 서울병, 서울 중심주의, 중앙정치 문제에 매몰되지 않은 이들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마이너리티이며 고독을 견디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재향 나르시스트’들은 무척 특수한 집단으로 식민지형 자기애에 사로잡힌 이들이다. 이들은 나르시스즘에 젖은 서울병 부류와 극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지방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삶을 택했다는 것에서 구별된다. 이들은 서울에 갈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서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권력을 따르는데 거부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이 제국의 구조를 해체하고 폭로할 능력과 용기는 없는 이들이다. 대개 사회과학적 분석이나 지적 기반이 취약하고 이론과 분석의 정합성과 엄밀함이 떨어진다. 이들의 근본적 이해관계는 이 모순적 구조가 유지되는 데 있으며 탈제국을 이룬 혁명가 부류와 달리 이 체제와 구조 속에서 지방 식민지가 지향하는 변화나 혁신의 흐름(사실상 서울 흉내 내기)에 편승하고 부합하여 거기서 경제적 급부와 사회적 명예를 얻는다. 혁신이나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실질적으로 구조의 변화를 추동하고 그것을 구축할 의지와 역량이 없고 오히려 심정적으로 그것에 거부감을 가진다. 오히려 현재 체제의 존속과 이 체제의 모순을 완화하려는 시도가 그들의 영역이며 그들의 이해이다. 이들의 특이점은 이들이 전통적 학생운동이 소멸한 이후 과거 그들이 수행하던 지방에서의 진보적 시민사회와 정당의 활동가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의 정당과 시민사회 활동, 사회적 경제 등에서 종종 눈에 띄는 이들이다.
5.
직업훈련소 혹은 공부의 종착지로 입시 기구가 된 대학 내에서도 몇 가지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눠 보면 인(忍)-대학, 인(IN)-대학, 탈(脫)-대학, 대(代)-대학의 부류로 나뉠 것이다.
첫 번째 인(忍)-대학은 말 그대로 대학의 제도와 구조의 모순에 문제를 느끼지 않거나 설사 무제를 인지하더라도 변화 가능성을 포기하고 어쨌든 졸업장 받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여 좋은 직장으로 옮겨가기 위해 대학 문제를 감내하는 선택이다. 대학을 출세 혹은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위한 입시와 직업훈련의 기구로 전락하게 하는 주류의 인식인 이런 태도에서는 대학이 추구하는 이상과 교육, 배움보다는 단기적인 성과와 실적, 증명 가능한 자격이 더 중시된다. 자연히 인(忍)-대학의 태도 속에서 대학은 목적과 가치보다는 수월성과 쓸모, 유용성으로 평가받는다. 비싼 등록금조차 본인의 삶에서 주는 지대 효과와 성공, 안정의 기회를 위해 견뎌야 할 것이 될 정도로 이들은 대학의 위기 자체에 둔감하고 대학을 그저 미래를 위해 지나치는 과정으로만 인식한다.
인(in)-대학의 태도는 여전히 대학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미의 가능성을 믿고 대학 내부로부터의 변화와 개혁을 신뢰하는 태도다. 이는 대학이란 플랫폼을 고수하는 복각의 운동이며, 대학이란 제도와 공간 자체가 가지는 근본적 가능성을 여전히 신뢰하는 운동이다. 대학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비판적 교수 집단에서 가장 지배적인 태도이지만 한편에선 과거의 대학상에 갇혀 대학의 존재와 의미를 낭만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과거 김예슬 선언으로 대표되는 대학 포기의 흐름은 그간 검토되지 않던 탈(脫)-대학의 가능성을 바라보게 했다. 탈(脫)-대학의 핵심은 대학이 더 이상 개인과 사회에 지적, 도덕적 영역에 있어 긍정적이고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없다는 판단에 있다. 이는 현재 대학이 마주한 곪아 버린 문제들에 대한 회의와 반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지식과 정보의 유통 매개를 대학이 독점하지 않고 있으며, 대학을 졸업해도 과거처럼 안정적이며 양질인 일자리와 연계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저변에 깔려 있다. 탈 대학의 핵심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탈 대학은 단순히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이나 공무원 시험을 택하라는 조언부터 대학 바깥에서의 배움과 같이 넓은 스펙트럼을 갖게 된다. 이것이 저항적으로 이뤄지면 아래에 후술될 대(代)-대학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대개 고졸 9급 공무원 준비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代)-대학의 흐름은 대학 외부에서 과거 아카데미가 수행하던 역할을 대체하는 사회적 기구를 통해 대학에 대항하고 지식 하부구조와 담론 구조에서 퇴락한 대학과 맞서는 움직임이다. 이는 한편으로 ICT 기술의 발전을 통해 만들어진 평생학습 체계의 등장, 유튜브나 MOOC와 같은 고등교육 학습이 가능한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과 관련 있다. 이처럼 뉴미디어와 결합한 대학의 대체 플랫폼을 만드는 움직임 외에도, 단순히 배움을 대학이란 공간에 한정하지 않고 대학 바깥에서 대학에서 나온 연구자와 학생들이 만드는 다양한 학술기구나 학술운동 역시 이 범주에 포함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런 운동은 대학 내부에서 탈락한 교수자원들 혹은 현재의 대학 체제에 실망하고 분노한 연구자들이 만드는 대학 외부의 대학인 경우가 다수이다. 그만큼 재정적으로 취약하고 자원이 제한되어 있는 대안대학이 정착하고 제도화되긴 무척 힘든 것이 현실이다.
대학의 퇴락과 느린 죽음에 대처하는 여러 태도에도 불구하고 대학 자체의 존재 이유와 대학이 하나의 제도이자 공간으로 가지는 역사적 소명에 대한 검토는 무척 부족하다. 동시에 대학이 입신양명의 통로인 상황에서 배움과 연구가 어떻게 가능한지, 대학만이 수행할 수 있는 방대한 지성사적 기획의 가능성 등은 온전히 검토되지 못하고 있다. 대학이 그 자체로 지니던 어떤 특권적 지위를 사실상 상실하고 대학의 자유와 자율성마저 국가와 자본에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학이 가진 본래의 의미와 역할, 규범에 대한 검토는 더욱 절실해 보인다. 이는 단순히 우리의 짧은 경험에 대한 술회로는 불가능하며 훨씬 장구한 대학의 역사적 기원과 그 변화 과정에 대한 추적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한편 이렇게 재검토되고 고찰된 대학의 역할과 의미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정녕 대학 외부에서 대학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대학 체제 내에서 소외되고 밀려나는 공간들은 새로 대학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좋은 기회의 공간이다. 이미 경쟁 체제에서 밀려나는 대학이기에 도리어 이 경쟁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여지가 생길 수 있다. 문제는 경쟁에서 탈락하고 밀려 나가기에 더 경쟁질서와 논리에 충실하려는 정치적 압력을 견디는 힘이다. 만약 대학 내부의 역학 관계에서 합의와 전망을 통해 그런 정치적 내파력을 구축할 수 있다면 지방대학이야말로 대학의 변두리에서 대학을 재건하는 공간, 경제적 출세와 사회적 계서의 상승에 대한 욕구가 아닌 온전한 배움과 비판, 비평의 공간으로 대학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닌다. 현재의 대학 세계를 움직이고 규정하는 권력의 변방에 기회가 있다. 오래된 아카데미주의자들이 갈망하는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를 넘어, 직업 훈련소와 최종적 ‘공부’의 종착지, 청년 노동의 공급자, 수월성 교육의 현장을 넘어선 새로운 변화와 실험, 그 모태로 변두리를 상상하고 검토해야만 한다. 이런 실험과 변화를 통해 대학이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현재의 대학과 구별되는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면 이는 우리가 새로운 대학을 상상하는 뿌리가 될 것이다.
re:0.
지방 대학은 한국 사회에서 잘남과 못남, 성공과 실패, 올라감과 떨어짐을 결정하는 이중의 잣대 아래에서 못나고 실패하고 떨어지는 배역을 맡고 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실질적인 역량이나 의식, 철학, 인품 등 인격적 요소와는 무관하게 지방대학에 다니고 지방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자존을 갉아먹고, 자신을 부정과 비관의 파도에 내던지게 한다.
동시에 지방대학을 다니는 것은 자기 삶의 공간을 한국 사회의 2부 리그로 정하는 일이다. 개중에 가끔 놀라운 경쟁과 노력으로 1부 리그에 올라가 온갖 불안정함(그 노력과 경쟁의 결과가 생을 가로지르는 불안정이라니)에 닿곤 하지만 대개 2부 리그에 있다는 건 그의 미래 역시 평균적으로 2부 리그 안팎을 배회함을 뜻한다. 그들 대부분은 지방의 서비스 산업의 사원이나 하청 네트워크의 하급 관리자, 엔지니어 이상을 벗어나기 힘들게 될 것이다.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에 취업하는 것만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삶의 트랙을 달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늘 1부 리그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고 겸허히 거의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한다. 그들의 부모가 원전과 공장, 전깃줄에 땅을 빼앗기듯 그들은 자신의 생명과 시간과 활기, 먹고 사는 모든 것들을 서울이 상징하는 중앙의 번영과 풍요를 위해 내놓아야 한다. 자존감과 행복마저 차압당한 지방, 지방대의 현실이지만 정작 지방으로부터의 저항의 기운은 요원해 보인다. 학벌주의 반대 운동의 핵심이 이 구조에서 수난받는 지방대생이 아니라 오히려 서울의 괜찮은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거나 그 출신들이 다수란 사실은 이 운동에 대한 회의감만 증폭시킨다.
지방에 있음은 단순히 무능하고 떨어지고 탈락한 삶을 뜻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실력주의와 실적주의의 신화 속에서 이런 말은 그저 막막하고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중앙에 서 있지 않기에, 서울에 살지 않기에만 느낄 수 있는 감각과 시선이 존재한다. 변두리, 변방에 선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재향 청년은 훌륭한 혁명적 계보학자가 될 가능성을 가진다. 그들을 규율하고 옥죄고 제한하는 이 권력이 어디로부터 연원하고 있는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불안정하다. 하지만 그들의 수난은 서울에 비해 잘 알려지지도 않고, 지방+청년이란 단어의 결합이 만드는 길항작용은 자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지방에 있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단지 문화적으로 서울에 비해 공연이나 전시가 좀 적거나 없고, 경제적으로 취업이 힘들고 지역에 양질의 일자리가 없다는 것 정도로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내부 식민지화된 지방의 위상, 서열화된 대학,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청년, 이 세 가지의 화학적 결합은 한국 사회에서 무척 독특한 형태의 지잡대생이란 결합물을 낳았다.
지잡의 미래는 서울을 따라가는 데에 있을 수 없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서울 따라하기의 실패자들이고 낙오자들이다. 서울과 대학 서열 모두에서 실패한 이 이중의 낙오자들에게 다시 서울을 좇고, 더 높은 서열을 위해 노력하길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척 비극이다. 우린 이들에게서 다른 희망을 찾아야 한다. 경계를 오가고,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에게서만 자랄 수 있는 그 마음, 그 감각, 그 시선으로부터 서울에 있었다면, 좋은 서열의 대학에 다녔다면 할 수 없는 일들, 상상할 수 없는 담대한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 단순히 지잡의 위치에 있기에 이 구조적 모순의 뿌리를 직시할 수 있는 것을 넘어 그로부터 새로운 도전을 도출해내야 한다. 전통적인 대학, 이미 퇴락해버렸고 죽어가는 대학이 줄 수 없는 무언가를, 자존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대학을 지방으로부터 상상해보자. 그것만이 이 이중의 억압과 지배의 구조를 넘어서는 길이다. 주류에 기입되지 못한 자들이 연대하고 함께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자. 이를 자존 삼아 그 주류를 넘어서는 상상을 해보자. 혁명은 원래 그런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만국의 잡놈 만세, 만국의 촌놈 만세. 변화의 담지자 만세.
도움받은 책들
강준만, 2008, 지방은 식민지다, 개마고원
김현경, 2015,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서경식 외, 2007, 교양 모든 것의 시작, 노마드북스.
서동진, 2009,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배게
오찬호, 2013,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요시미 순야, 2014, 대학이란 무엇인가, 글항아리.
지주형, 2011, 한국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기원, 책세상.
[필자 소개]
이시훈
대구에서 20대를 학생운동과 진보정당 언저리 라이프로 보냈다.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에 있으며,
인문사회 독회 본색소사이어티 공동 창립자와 대표를 맡았다.
대학연구네트워크 공동 설립 제안자를 맡고 있다.
<외줄산책>은 ‘경계선에 서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는 것 같은 생각들’을 모아 산책하듯 가볍고 즐겁게 이야기해보고자 만들어진 잡지입니다. 창간호는 대학을 그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탈대학’이라는 키워드를 던진 것은 대학을 벗어나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자는 것보다는, 대학의 기능과 위치와 역할을 다시 사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 가볍기만 한 글들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하루 종일 함께 산책하듯 읽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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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대학연구네트워크(준)>과 더불어 한국대학학회가 발행하는 <대학:담론과 쟁점> 통권 5호에도 수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