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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곡동 서작가 Feb 27. 2022

우리들의 할머니

<사다 보면 끝이 있겠지요>, 김두리(최규화)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그리고 부러웠다. 더 늦기 전에 할머니의 생애를 담기로 마음 먹고 할머니의 육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가, 그리고 그런 손주를 둔 할머니가.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다. 2011년에 해외로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났을 때, 할머니의 기억은 그 이전까지 한번도 내게 내보인 적 없었던 열 한살, 열 두살 무렵의 할머니를 꺼내놓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할머니는 늘 뜨개질을 하며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 주변 사람들 이야기, 아니면 성경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었다. 첫 번째 남편과는 전쟁 중에 헤어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됐고, 피난 중에 등에 업힌 채 죽은 갓난 아이를 어딘가에 묻고 돌아서야 했으며, 민주당 정치인이었던 두 번째 남편과 사실혼 관계가 되면서 서울 가회동에 정착했으나 정치적 격변기에 남편이  급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아무도 모르는 존재가 되어 혼자 고향 근처로 돌아가 아이 셋을 건사하며 살아야 했던 할머니에겐 이야깃거리가 차고 넘쳤다. 내가 어린 아이에서 청소년,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면서 할머니의 이야기 속 시점은 자꾸만 시간을 거슬러 갔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여름 나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할머니는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1925년생 소띠 김북경은, 일제강점기 때 ‘고가네 요시꼬’였던 그는,

어린 시절 고생하는 엄마를 돕기 위해 머리에 물항아리를 지고 날랐던 착한 딸이었던 그는,

내가 모르는 젊은 시절을 거쳐 어린 내 앞에 이미 ‘할머니’로 나타났던 그는,

그렇게 생의 마지막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그 마지막 날, 내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를 보며, 저 이야기들을 붙잡아 기록하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을 스치듯 했었다. 그 생각을 조금 더 일찍 했었어야 하는데, 그 때만 해도 나는 내가 그 작업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으면서도 나는 나의 인생을 위해 떠나야만 했던 그 해. 할머니는 미국에 있는 내게 두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두 번째 편지에 아직 답장을 하기도 전에 나는 아이를 갖게 됐고, 그 뒤로는 출산과 폭풍 육아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2014년 10월, 부고를 들었다. 할머니는 결국 영영 떠나버렸고, 나는 알았으면서도 잡지 못한 그 시간이 아깝고 그리워 바다 건너 타지에서 목놓아 울었다.


책을 읽으며, 내 할머니의 육성을 듣는 듯해 웃었다가, 눈물 지었다가 했다. 분명 이 책은 김두리 할머니의 생애사지만, 그 속엔 나의 할머니 김북경의 생애가 겹쳐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 할머니의 역사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김두리 할머니의 역사 속에 비치는 내 할머니의 흔적을 보며 오랜만에 할머니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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