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쓸모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직장에 들어설 무렵 우리 사회는 베이비 붐이 사회에 급격히 진입하여 마침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대상황에 맞추어 중화학 산업이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직접 구조물과 기계장치를 설치, 운전하는 물리적이고 유형적인 일들과 행정업무도 비례적으로 늘어나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공장 운전실 내부 풍경은 3교대하는 인력이 한쪽은 설비를 관리하는 팀, 다른 한쪽은 공정을 판단하는 팀으로 각각 4,5명씩 구성되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설비와 공정 운전을 동시에 운영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경험과 전문성이 현저히 부족한 시기였기에 필요하였다. 각 팀에는 리더 역할을 갖는 주임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일천한 조업, 설비 경험 속에 리더로 세워진 탓에 상대적으로 책임감을 느껴 자신의 주장을 계속 설득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기술에 대한 학습의욕이 높았다. 공장의 일상 모습은, 특히 야간 근무 시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다 피운 담배필터를 가지고 빽도? 같은 놀이로 커피내기 등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근무수칙 위반에 해당되는 엄중한 상황이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용인되던 시기였다.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은 주요한 의사결정 보고를 위해 여러 날 정리한 내용을 A1 용지 크기의 차트에 정리하는 일이었다. 이 업무는 자체적으로 초안을 작성하는데 내용 구성과 구도 및 형식을 갖추는 일이었다. 여러 날 기본 안을 작성한 후 결재가 되면 인근에 있는 명필 외부 차트사? 에게 의뢰하면 며칠 후 보고 제목을 갖춘 두툼한 나무 걸게 차트로 제작되어 납품된다. 이를 들고 원거리에 계시는 엄숙한 표정의 의사결정자 앞에서 출장 보고하는 그런 일들이 일상이었다. 얼마 뒤에 차트사에게 보내는 문서는 보고 전용 컴퓨터(당시 WYSIWYG: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이 가능했던 맥킨토시 컴퓨터)로 작성해서 OHP 필름으로 제작한 후 투사 장치를 이용한 보고로 전환되었다. 그 이후는 모두가 알 듯이 관련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따라 순식간에 컴퓨터로 대표되는 기계로 대체되었다. 반면, 보고 업무와 달리 여전히 대부분의 일상 업무로 여겨지는 각종 통계처리와 이를 분석하는 다양한 업무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 이른바 모눈종이 형태로 미리 제작된 차트에 '점찍기' 업무를 담당하는 고 근속 사원의 일상을 입사 초기부터 꽤 오랜 시간 볼 수 있었다.
최근에 '로보틱 처리 자동화(Robotic Process Automation)'라는 다소 생소한 시스템에 의해 분석된 메일이 매일 몇 건씩 배달되고 있다. 로보틱 처리 자동화(RPA)는 로봇이나 소프트웨어(SW) 등으로 비즈니스, 노동 등 업무를 실행하는 기술이다. 로보틱 처리 자동화 수행 로봇 또는 소프트웨어(SW)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해석해서 업무에 활용하는 등 광범위한 반복 작업을 수행한다. 업무처리 속도는 사람이 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면서 인적 오류가 발생할 일이 적어 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방식의 메일은 매일 반복되는 공장 조업 결과에 대한 리포트들로 얼마 전까지 신입 엔지니어들이 거쳐야 할 필수 업무였다. 관심 대상 공정 지표에 대한 전일-주간-월간 결과를 담고 있어 작성을 위해서는 여러 곳에 흩어진 결과물을 일일이 찾아 차트를 채우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반복적이고 기능적인 규칙이 있어서 그간 루틴 한 업무로 지목되어 왔는데 이제야 이 업무가 로봇 소프트웨어를 통해 가능케 되었다. 업무를 맡은 담당자는 이를 위해 최소 1시간가량 소요되어 얼마 전까지는 자발적? 조기 출근을 통해 작성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했던 업무였다.
테일러(F.W. Taylor)의 작업분석이론을 시작으로 인류는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인간이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왔다. 그의 과학적 관리법은 잘 알려진 대로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과학적인 분석으로 제도를 개선하여 대응한 방법론이다. 작업 동작 분석 후 불필요한 움직임을 제거시켜 표준 동작을 책정하고 그것을 조합하여 작업 시간을 산출하였으며, 표준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는 방식이다. 이 테일러 시스템은 그 후의 경영관리기술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공정한 1일 작업 표준량을 제시하여 이른바 과업 관리(task management)를 하는 기능식 직공 장제도를 도입한 관리방식이다. 이후 포드 시스템은 테일러 시스템을 더욱 진보시켜 대표적인 이동 조립법을 통해 ‘일에 사람을 가져가는’ 대신 ‘사람에게로 일을 가져가는’ 발상 전환? 형 생산 시스템이다. 즉, 작업공정의 순서대로 배치된 작업자 앞을 재료가 컨베이어에 의해 규칙적으로 통과화며, 각 작업자는 고정된 장소에서 일정한 리듬을 타고 작업에 임하는 생산 시스템이다. 이후 도요타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TPS(Total Production System)은 아래와 같은 특징으로 요약된다.
작업자가 여러 대의 기계를 담당한다. (다기능공)
공정의 끝에서부터 생산량이 결정되는 시스템을 적용한다. (Pull system)
공정에서의 작업이 중단 없이 연속적으로 수행되도록 한다.
가공과 조립의 라인을 동기화(同期化) 한다.
칸반(看板)을 사용한다.
생산의 표준화를 기한다.
표준 작업을 설정한다.
가공 작업과 운반 작업을 분리한다.
물품의 운반 양을 규격화한다.
납입 부품의 납입 단위에 대해 정수제(定數制)를 채용한다.
앞에 설명한 내용을 적어 내려가다 보면서 다른 시각으로 바라 보니 '인간의 노동개선을 위해 설계되고 실행되었지만, 마치 현대의 기계(로봇)를 위한 지침서'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거듭한 생산성 향상과 개선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인간에게 적용하여 압축적으로 높은 성과를 취해왔다. 그간 지속적으로 비 인간화 요소를 개선해 오긴 했지만, 개념의 요체는 결국 높은 생산성을 위해 인간의 노동 기능을 확대, 최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AI와 로봇 및 IOT로 대표되는 4차 산업기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적으로 1차 산업혁명 시기에 경험했던 '기계에 의해 빼앗긴 인간의 일자리를 회복'시키려던 러다이트 운동을 21세기에 다시 고민해야 할까? 결론은 그렇지 않다. 그간 동작분석, 효율 개선, 최적화등을 위해 애써온 수많은 성과물을 사람에게 적용하면서 제기된 ‘인간의 기계화’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이제 4차 산업 이후의 사람은 그간 제기된 기계적인, 효율적인 일로부터 벗어나 인간만이 생각할 수 있는 ‘쓸모없는’ 낭비를 재발견해 볼 필요가 있다. 오랜 세월 분석하고 연구된 성공적인? 일하는 방식의 혁신은 어쩌면 AI 로봇을 위한 운영 sw와 같은 것으로, 안류는 그간 여러 생산성에 관련된 진리라는 명제를 21세기 로봇에게 제공하기 위한 알고리즘의 다양한 집합체를 준비해온 것은 아닌지. 인간이 구축한 다양한 생산성에 관련된 지식은 어쩌면 로봇에게 전수하기 위해 준비된 것으로 생각된다. 로봇은 인간이 어떻게 일하는지 관찰하여 그 기능을 규칙화하여 프로그램화된다. 그래서 정형화되고 단순화된, 그렇지만 위험하고 틀림없이 해 내야 하는 인간이 해왔던 기능의 일부를 부여하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에 대해서는 인간 되게 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고민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른바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의 배경중 하나도 로봇과 자동화로 대표되는 높은 생산성 확보와 과도하고 부적절한 노동에서 벗어나면서 얻어지는 잉여 이익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전제 논리가 되기도 한다. 아직 국가와 지역에 따라 성급한 시도일 수 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다음 세대에게는 적용할 만한 가치 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앞두고 개개인이 갖는 자신만의 쓸모없는 루틴에 대해 이제 누구도 낭비라고 이야기하는 이는 없다. 인간은 쓸모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그런 쓸모없어 보이는 낭비를 건너서야 비로소 창의적이고 가치가 가득한 무언가를 성취해 나가는 존재이다. 이제 ‘인간이 일하는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