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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나뮤나 Sep 07. 2023

웨하스 의자 / 에쿠니 가오리 지음 ; 김난주 옮김

KOR FIC EKUNI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는 무심하고, 문장의 호흡은 짧다. 한참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머릿속에서 따따따- 따따따- 하면서 문장들이 모스부호처럼 짧게 짧게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주제가 얼마나 가볍든 얼마나 무겁든 에쿠니 가오리는 그녀 특유의 무심하고 짧은 문장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대체로 절망이니 죽음이니 하는 주제는 무겁고 어둡게 다뤄진다. 맘만 먹으면 숨 한번 크게 들이켜 마신 후 마침표 없이 책 한 권을 줄줄 뽑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와 만난 절망과 죽음은 따따따- 따따따- 하며 짧게 툭툭 끊어진다. 이 반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통통 튀는 사랑 얘기라도 에쿠니 가오리를 만나면 맥이 빠질 정도로 짧게 끊어진다.


그래서 에쿠니 가오리의 글에서는 발을 질질 끌고 다니는 절망도 공중을 떠다니듯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고, 통통통 튀어 갈 것 같은 사랑도 갑자기 중력을 만난 우주인처럼 바닥으로 푹 꺼져 천근만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웨하스 의자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줄리앙이라는 개의 이름이 나오지만 그뿐이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엄마, 아빠, 동생, 애인 등 주인공과 맺고 있는 관계로 묘사될 뿐이다. 내 삶에서 유의미한 것들의 이름은 모두 지워져 있다.


절망, 고독, 사랑, 삶, 죽음 이런 것들 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애당초 온전히 공유되는 것이 불가능한 경험들이다. 그래도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의미 있는 자들과 공유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웨하스 의자의 "나"는 외롭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은 나누어지지 않고, "나"는 모두에게서 동떨어진 존재로만 경험된다. 그 지극한 외로움은 "나"에게 유의미한 것들을 지우는 시도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곧, 대상에게 특정화된 "이름"이라는 고유번호를 부여하는 대신 보편화된 "관계"라는 식별번호를 부여해 내가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 형태로 이야기가 풀려가는 이유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들의 존재가 너무도 소중해 차마 그들을 이름으로 특정 지어 말할 수 없었던 것뿐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름 없는 그들은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고,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와 동시에 "나"는 그들의 유한함과 나의 유한한도 알고 있다. 그래서 두렵다. 언젠가 그 유한함 속에 유일무한 존재들이 사라져 가는 광경을 목격해야 할 것만 같아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지우고 관계로만 대하며 그들 존재의 본질을 외면한다.


하지만 "나"는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대상을 뭐라 명명하든 나는 그 대상으로 인해 아프고 기쁘며 울며 웃으며 쓰리고 평온하다.


본질은 언어로 표현해 낼 수 없다. 제한된 경험과 제한된 언어로 본질을 표현하여 그 본질이 타인에게 가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이름과 관계로 돌아가 보자. 이름은 머릿속에서 지워질 수 있다. 하지만 관계는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핵심에 가까울수록 본질에 가까울수록 머릿속으로 생각을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이 당연하다. 그것은 본질이라는 것은 머리보다는 가슴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언어보다는 직관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랑해"
애인은 나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나도 사랑해."라고 말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망가지고 있다


웨하스 의자는 에쿠니 가오리의 담담한 문체로 읽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소설이다. 따따따. 따따따 글자들이 떨어지는 거기가 마치 이야기의 다 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웨하스 의자는 처음부터 말로는 설명해 낼 수 없는 그 뒤의 이야기들을 향하고 있는 담담함 뒤의 암담함 같은 이야기다. 에쿠니 가오리의 무거움을 거스르는 가벼움이 그리 진진하지 않은 태도로 진술되어 있는 멋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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