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를 읽고.
201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기존의 도구로 예측할 수 없는 정치 현상들이 터져나오자 세계는 혼란에 휩싸인다. 한 통계에 따르면 트럼프 현상을 설명하는 책이 약 100권 정도 출간됐다 한다. 초기의 주류이론은 ‘계급배반투표’이론이었다. 즉, 경제적 계급을 렌즈로 하여 기현상을 설명한 것이었다. 토머스 프랭크의 저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민주당의 이재명 의원이 뭇매를 맞고 있는 멘트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건 기본적으로 합리적 선택 이론에 기반하고 있다. 즉 인간은 합리적 선택을 하는 존재란 걸 기본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을 넘어오며 서서히 다른 설명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바로 “참여-정체성 이론”이다. 에이미 추아 <정치적 부족주의>, 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 브라이언 클라스 <권력의 심리학>이 대표적이다.
인간은 본래 집단주의적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요지다. 지난 200여년 간 인간의 계몽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 이념이 오히려 예외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섬뜩할만한 표현이 있었는데, 인간의 이성이 항상 합리적인 데에만 쓰일 거란 보장은 없다는 대목이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본인들의 소속집단의 신념을 합리화하는 데 철저하게 작용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요컨대, 인간들은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존재였다!
이 책의 전반부는 풍부한 참고문헌과 실험결과 등을 제시하며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부족주의, 집단주의적 정체성을 설명한다. 특히 최근 오남용되고 있는 ‘정체성 정치’란 용어에 엄밀한 잣대를 들이민다. 인간들은 모두 정체성 정치를 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강력한 동력은 바로 ‘정치적 정체성(당파성)’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정치적 정체성(당파성)을 기저에 깔고 그 위에 인종, 성별, 지역, 종교 등의 미시적 정체성을 결합시킨다는 것이다. 이제 현실정치를 가로지르는 정서는 “내가 지지하는 당보다 반대쪽 당을 더 싫어하는” 정서이며, 정치는 이제 “스스로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게 현실이다.
후반부에는 미국정치 시스템의 오작동을 설명한다. 시스템의 오작동은 다음과 같다. 양극화한 대중들이 정치인들의 언행을 양극화시키고, 이를 본 대중들은 더욱 양극화된다. 이 악순환이 상호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즉, 상대당의 증오스런 정치인은 유달리 나쁜 놈이어서 그런 행동들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시스템이 ‘나쁜 놈들’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스템상으론 아무 문제가 없다.
따라서, 이제 미국정치는 “당파성은 강한데 정당은 약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비단 미국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한국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매 선거때마다 당헌당규와 정당 이름이 바뀌는 것은 정당이 약해진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인 것이다.
제목은 ‘why’에 방점을 두고 있으나, 책의 논지는 시종일관 ‘how’와 ‘what’이다. 현대 미국정치가 양극화의 길을 걷게 된 경위와 그 심각성을 촘촘하게 논증한 책이다.
우선, 이 책을 알게된 건 NYT의 필진이자 온라인미디어 Vox의 창립자 Ezra Klein이 쓴 책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정치 전문 저널리스트인데, 굉장히 날카로운 논평을 남기는 걸로 유명하다. 이 책을 빌 게이츠가 추천하더니 얼마전 버락 오바마도 여름휴가 독서 리스트로 추천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스스로를 양극화 정서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으로, “전국단위 정치 뉴스” 소비 방식을 바꾸라고 제안한다. 우리 삶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지방자치 단위의 뉴스에 더 관심을 갖고 참여하자는 것이다. 내 삶과 관계 없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팀 스포츠’가 되어버린 중앙정치에의 과몰입은 결과적으로 내 정신건강에도 해롭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미국정치의 현황에서 한국정치의 잔상이 보였다. 최근 한쪽은 ‘핵관’들의 권력잔치, 한쪽은 ‘팬덤정치’에 몸살을 앓는 데 싫증이 나신 분들께서 읽어보심 좋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