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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은 당신의 ‘버럭’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회사에서 '버럭이'를 끄집어내야 할 때.

by 환오


입사하고 초창기에 사장은 나에게 칭찬이라는 당근을 무한리필로 제공했었다.


"최주임이 입사하고 회사가 정리되는 거 같아~"


그 말 한마디가 뭐라고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었다.

사실 전임자가 떠나고 나서 6개월 뒤에도 툭툭 튀어나오는 일의 구멍은 사장의 신경을 건드렸었다.


예를 들면, 신문을 해지했는데 여전히 자동이체 되어 돈이 나가고 있다던가.

아주 큰 일들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이 매듭이 잘 되지 않으면,

사장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경리는 회사의 보이지 않는 소소한 일들을 잘 메꾸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벌어다 주는 윗선에서 일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것이다.

내가 10년 동안 경리를 하면서 느낀 점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한다.

그것이 내 역할이었다.


그녀가 사장에게 보고하지 않은 일들이 야금야금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 때

사장은 내 앞에서 회사에 있지도 않은 그녀에게 화를 냈었다.

아, 왕조현 뺨치게 이뻤던 그녀의 얼굴도 이제는 약발이 다 됐구나.

그리고 가만히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언젠가 해외 거래처 손님들이 우리 회사로 출장을 오기로 돼있었는데

의자가 한 개 부족했다.

나는 부랴부랴 늦지 않게 의자를 주문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의자 회사에서 발송이 계속 미뤄지는 게 아닌가?

일 년에 두 번 정도 있는, 회사에서는 그해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만약 의자가 제 때 도착하지 못한다면 아, 상상하기도 싫었다.

당시에 그놈의 의자 하나 때문에 얼마나 똥줄이 탔는지 모른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의자 회사에 전화를 걸어 강하게 컴플레인을 걸었다.

평소와 다르게 내 언성이 높아졌었다.

그런데 그 소리를 사장이 들었었나 보다.

나는 전화를 끊고 속으로 내 안의 버럭을 들킨 것 같아 민망했었다.


그런데 사장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의외였다.

“최주임, 어우 화도 낼 줄 아네? ”

사장은 내가 회사의 업무에 차질을 빚지 않게 애쓰는 모습이 좋았던 거다.

의자를 구매한 우리는 당연히 예정된 날짜에 받았어야 했고

그 과정에도 내가 회사를 위해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인 점이 가산점이 되었나 보다.


회사는 갑과 을의 입장이 동시에 존재한다.

어쩔 땐 우리가 갑이고 어쩔 땐 을이다.

을일 때는 깨갱할 수밖에 없고, 갑일 때는 그에 응당한 요구를 할 수도 있다.


회사에서는 내 성격과 원래 가진 나만의 색깔을 잠시 내려놓고

회사가 원하는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월급을 주는 사장도 돈 주는 게 안 아깝다.

저 직원은 우리 회사를 위해서 일하네? 애쓰네? 이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사장 앞에서 생색내며 일하는 게 끝까지 잘 안 됐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오너가 보일 때 왜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 알 거 같았다.

내 밥값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쇼맨십도 필요한 게 회사생활이다.


회사는 정글이다.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어먹는 곳.

내가 안 잡아먹히려면 나도 강철로 된 방패를 들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가 공격하면 그 방패로 막고 숨겨진 칼로 상대를 공격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이제는 그런 정글도 졸업하지 8년이 다 돼 가지만

여전히 그 정글에서 고군분투하는 직장인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그 정글이 얼마나 냉혹한 세계인지 알기에.


오늘도 만원 지하철과 버스를 뚫고 각자의 직장으로 출근하는 당신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환오 연재]


월요일 오전 7시 : [주부지만 요리를 못하는 요똥입니다]

화요일 오전 7시 : [책! 나랑 친구 해줄래?]

수요일 오전 7시 : [환오의 도전, 엄마의 유산2]

목요일 오전 7시 : [공대생이지만 경리만 10년 했습니다]

금요일 오전 7시 : [거북이 탈출기 두 번째 이야기]

토요일 오전 7시 : [구순구개열 아이를 낳았습니다]

일요일 오전 7시 : [환오의 도전, 엄마의 유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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