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함양의 남계서원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는 귀촌을 생각한다면 함양으로 오라고 넌지시 권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농월정, 거연정, 동호정 등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정자를 꼭 가보라고 했다. 또한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인 일두 정여창의 고택이 있는 개평한옥마을을 꼭 둘러보고 가라고 추천했다. (정여창은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아쉽게도 그때는 시간이 늦어 정자들도 일두 고택도 방문하지 못했다. 인연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해가 바뀌어 달성의 도동서원과 경주의 옥산서원을 방문하려고 길을 나서며 함양과 남계서원에 다시 들렀다.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에 영남 유림의 본산으로 낙동강 왼쪽은 안동, 오른쪽은 함양이라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여기서 좌란 경상좌도란 뜻으로 서울서 경상도로 내려오다 왼쪽으로 꺾어가는 곳으로 낙동강을 기준으로 왼쪽을 경상좌도, 오른쪽을 경상우도라고 했다.
안동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함양에는 남명 조식이 있다. 안동에 유성용과 하회마을이 있다면 함양에는 정여창과 개평한옥마을이 있다. 그야말로 안동과 함양이 쌍벽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함양여행은 지안재에서 시작했다. 굽이굽이 휘는 길을 따라 고개를 넘는 곳이다. 인공이 가미됐지만 무척 인상적이다. 길을 따라 운전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굽이굽이 올라 고갯마루에서 마시는 커피도 꽤 낭만적이다.
지안재를 지나 남계서원을 들르고 개평한옥마을의 일두고택을 방문했다. 일두고택은 입구부터 인상적이었다. 16~17세기에 건축된 전형적인 조선시대 한옥이어서 그랬을까?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 애신의 집으로 나와 익숙해서였을까? 낯설지 않은 고택이다.
애신이 촬영한 곳은 사랑채는 아니었을 테고 여인이 머무는 공간인 안채 어느 곳에서 그 단아한 모습을 촬영했겠지? 아쉬운 것은 문화재로 개방은 되었지만 넓은 집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가 서쪽으로 급하게 넘어가는 시간에 농월정(弄月亭)으로 향했다. 말 그대로 ‘달을 희롱하는, 아니 달을 마음먹은 대로 다루는 누정’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계곡이 압권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를 품은 듯한 풍경도 있었다. 이쯤이면 내가 선비라 해도 이곳에서는 달을 희롱하고 싶을 것 같다. 하늘나라 선녀들이 계곡에서 목욕하며 그러지 못하는 달을 놀렸을 것 같았다. 농월정, 결코 과장되지 않은 이름이다.
농월정에서 상류 쪽으로 6Km쯤 올라가면 거연정이 나온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의 상류다. 기암괴석이 가득한 화림동을 관통하는 강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 위에 거연정이 도도하게 자리하고 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절경이다. 시문에 둔한 사람이라도 시 한 수가 절로 나올 것 같다.
남덕유산에 숨겨 놓은 화림동 계곡. 아기자기한 정자와 시원한 너럭바위가 많아 예부터 팔담팔정(八潭八亭· 8개의 못과 8개 정자)으로 불려 온 곳이다. 화림동 계곡은 과거를 보기 위해 먼 길은 떠나는 영남 유생들이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지나야 했던 길목이기도 했다. 이렇게 멋진 자연이 함양 유림(儒林)을 키운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