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 4월 24일, 비엔나의 아우구스티너 교회(Augustinerkirche)에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스의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23세, 시 씨(Sissi)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엘리자베스는 겨우 16세였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원래 요제프 황제는 시씨의 언니인 헬레나와 약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느날, 황제의 온천(Kaisertherme)이라고 불리는 소금온천이 있는 바트이슐에 휴양차 왔다가 언니를 따라온 시씨를 보고 반해 버렸다. 황제는 곧바로 시씨에게 청혼했고, 다음날 오스트리아 호텔에서 약혼식을 치렀다. 신데렐라 같은 극적이고 로맨틱한 약혼식 이후, 사람들은 시씨를 동화 속의 공주처럼 추앙하기 시작했다.
약혼식을 치른 후 황제는 15세의 어린 소녀 시씨를 데리고 바트이슐에서 멀지 않은 할슈타트에 머물며 사랑을 키웠다. 다흐슈타인 산봉우리를 맑게 비추는 구자우 호수로 데려가 사냥을 즐기며 달콤한 시간도 보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시씨가 16세가 되었을 때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쇤부른 궁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타고난 아름다움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삼오(三五) 이팔(二八) 꽃다운 나이에 만나 결혼까지 이른 것이다.
영원할 것만 같던 달콤한 생활은 금세 끝났다. 뮌헨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시씨는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비엔나 궁정의 법도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부터 아들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엄한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와의 관계도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결혼식을 마치고 겨우 2주가 지났을 때 ‘작은 새는 새장 안으로 날아들었고 철창문은 닫혔습니다. 나의 동경은 점점 커지기만 합니다. 자유, 당신은 나를 외면했어!’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시씨는 힘들어했고, 우울증에도 시달렸다.
궁전 생활의 답답함을 피하고 조피 대공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씨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이나 그리스의 따뜻한 바닷가에 머물며 삶에 자신감을 회복한 시씨는 이때부터 미에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미녀라 칭송받은 시씨의 키는 173cm였는데 몸무게 40 Kg 후반, 허리둘레 20인치 정도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외모 관리에 쏟아부은 것이다.
시어머니인 대공비 조피가 세상을 떠나 더는 간섭을 받지 않게 된 시씨는 요제프 황제가 여러 여인과 바람을 피자 헝가리에 주로 머물며 더욱 빈번하게 여행을 떠났다. 점점 더 자유를 갈망하던 시씨는 경호원 없이 시녀만 데리고 스위스를 여행하다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하면서 삶을 마감했다. 시씨의 시신은 빈의 황실 묘지 카푸친 성당(Kapuzinerkirche)에 안치되었다.
살아서 국민에게 사랑받던 시씨는 죽어서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카프친 성당에 있는 그녀의 관 앞에는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꽃과 사진 그리고 편지로 가득하다. 호프브르크 궁과 쇤부른 궁에는 시씨 박물관도 있다. 또한 호프부르크 궁 옆의 시민공원(Volksgarten)에도 ‘잊지 못할 황후 엘리자베스에게 오스트리아 국민이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으로 1907년에 이 기념비를 세우다’라고 새겨진 대리석 기념비가 있다. 시씨는 오스트리아 국민뿐만 아니라 헝가리 국민에게도 사랑을 받았는데 그 징표가 부다페스트의 에르제베트(엘리자베스) 다리다.
영국사람들이 다이애나비를 사랑하듯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시씨. 신데렐라마저 질투를 느꼈을 그녀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났어도 뮤지컬과 영화로 그녀는 끊임없이 부활하고 있다. 신데렐라의 축복을 받던, 황제와 사랑을 속삭이던 바트이슐의 카이저빌라에서 두 사람의 숨결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