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보고서나 일기 같은 그런 글이 아닌, 수필이나 소설 등과 같이 감성이 조금은 담긴 그런 글 말이다. 글을 써보겠다는 결심을 처음 할 때만 해도 대단히 도전적인 목표였다. 글이라고 할 수 없는 조악한 문장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합리화를 했다. 글쓰기는 기능에 가깝다며 많이 읽고 많이 쓰면 나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다행히 10년의 시간 동안 문장은 조금씩 다듬어졌고, 표현도 나름대로 섬세해졌지만 글이 거칠다는, 주제가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글의 매끄러움은 오히려 퇴보하는 듯했다. 답답했다. 변화와 자극이 필요했다.
기회가 왔다
어느 날,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교실에 낯선 안내문이 등장했다. 계절학기에, 11월부터 이듬해 2월 말까지 특별교실을 무료로 개설한다는 내용이었다. 두 가지 과정이었다. 하나는 발레를 중심으로 하는 무용과 초보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극이었다. 무용은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연극에는 호기심이 강하게 생겼다.
사회관계망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적 상황을 토대로 개인이 겪게 되는 심적 갈등이나 정서적, 감정적 동요를 재료로 자신이 직접 대본을 구성하고 연기해 보는 문화예술활동을 표방하고 있어 솔깃했다. 교육목표가 마음을 잡아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등록을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때 글을 같이 쓰는 문우가 수강신청을 했다면서 내 등을 떠밀었다. 재미있지 않겠냐며, 같이 하자며…. 결국 떠밀려서 등록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 셈이다.
첫 수업, 수줍음을 떨쳐냈다
모집정원이 30명인데 첫 수업에 참가한 사람은 8명이었다. 연령층은 다양해서 20대에서 60대까지 골고루 등록했다. 비록 인원은 적어도 다양성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구성이었다.
강사는 러시아에서 연극대학을 졸업했고, 많은 무대 경력을 가진 현역 배우로서 극단의 대표도 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강사로서의 경력도 다채로웠다. 여러모로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수업을 어떻게 시작할까?
첫 시간, 그녀는 참석자에게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부르자며 각자 자기를 대변할 수 있는 별명을 지으라고 했다. 인절미, 체리, 곶감, 벨리, 바이올렛, 오렌지, 대추, 용과가 각자의 이름을 대신했다. 이어서 강사는 그런 별명을 짓게 된 이유를 설명하게 했다. 설명이 끝나자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손동작도 하나씩 만들라고 했다. 마침내 나이나 성별은 뒤로 물러서고 연기 초보 동료라는 동질감이 그 자리를 메꿨다.
별명을 만들면서, 손동작을 만들면서 어색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회사에서 임원까지 하면서 남 앞에 서는 것이 어색하거나 부담스렀던 기억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까닭 없이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낯섬은 마치 게임이라도 하듯 지목됐을 때 별명과 함께 손동작을 하면서 어색함을 웃음과 바꾸면서 사라져 갔다.
처음 겪는 수업 방식, 신선한 충격이었다
몇 주가 지나면서 서먹함이 사라졌다. 나이 어린 동료들과의 대화도 즐겁고, 그들과 얼크러설크러 지면서 관계도 훨씬 원활해졌다. 자식 같은, 혹은 막내 동생 같은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기운도 듬뿍 받았다. 수업시간이 기다려졌다. 세상을 제법 살고서도 수업시간이 기다려지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수업방법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어서 매번 감탄하곤 한다. 예를 들면 칠판 위에 네모난 박스를 그려놓고 그 안에 짧은 테이프를 붙인다. 다음 사람은 그 테이프와 연결되게 새로운 테이프를 붙인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돌아가면서 테이프를 붙이면 피카소도 울고 갈 추상화가 만들어진다. 강사는 수강생에게 어떤 형상으로 보이는지 한 단어로 대답하라고 했다. 각자 느낀 대로, 보이는 대로 형상을 얘기한다. 그다음에 수강생들이 말한 단어가 모두 포함된 짧은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쓰게 한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맞대고 스토리를 수정하며 나름의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완성된 시나리오를 토대로 각자 배역을 결정하고, 어설프지만 짧은 연극을 선보였다. 이처럼 매 시간마다 게임하듯 수업이 진행되니 기다려질 수밖에....
외국에서 대학생활을 한 사람은 일찌감치 겪어본 수업방식이라는데 내겐 생소하기만 했다. 이런 수업방식이라면 그 결과로 얻어지는 성과도 대단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환점을 돌았다. 남은 시간엔 무엇이 기다릴까
남은 시간에 펼쳐질 수업도 가슴을 뛰게 한다. 후반부에는 연극제작 실습이 주요 수업내용이다. 작가, 배우, 연출자라는 세 가지 경험을 모두 하여연극이 지닌 재미와 미적, 예술적 체험을 경험하게 하려는 수업목표도 완성되는 셈이다.
생각지 않은 귀중한 성과다. 이 수업의 결과로 글쓰기 주제도 더 넓어지고, 글도 부드러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연기 잠재력도 발견될지 누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