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따가운 5월 초순의 어느 날. 온 가족이 논에 나가 일하고 있을 때 집에 불이 났다. 가족들이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흙벽에 볏짚을 올린 엉성한 초가는 순식간에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가족들은 모든 것이 타 버린 잔해 앞에서 넋을 잃고 말았다. 세간살이 하나 건지지 못한 가족들이 무엇보다 안타까워한 것은 족보도 불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족보를 되살리려면 같은 뿌리의 족보를 가진 집을 찾아야 했지만 먹고살기 급급하던 때라 오랫동안 다른 지역의 일가들과 왕래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수소문 끝에 전라북도 장수(?)의 거미혈에 일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가 집안을 대표하여 거미혈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족보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보도 듣지도 못한 사람이 불쑥 찾아와 황당한 부탁을 한다며 단칼에 거절한 것이다. 집에서 거미혈까지는 100여 리.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그 길을 헤아릴 수 없이 왕래하며 사정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붙임씨’를 하려는 불순한 사람이라며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이 건국됐을 때 양반은 전 인구의 5%, 평민은 70% 그리고 천민이 25%쯤 됐다고 한다. 이 비율이 철종(1849~1864) 때는 양반 70%, 평민 25%, 천민 5%쯤으로 바뀐다. 대부분 백성이 양반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변화 요인의 하나로 임진왜란 후 대규모로 발급된 공명첩을 들 수 있다. 돈만 있으면 양민이나 천민이 합법적으로 양반이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공명첩은 순조(1800~1834) 때에도 발급된 기록이 있다.
훈도방에서 은밀히 거래된 족보도 양반의 증가에 한몫했다. 훈도방은 을지로 2가 및 3가 일대의 옛 이름으로 인쇄업체가 밀집되어 있었다. 인쇄업자들은 의뢰받은 숫자보다 많은 족보를 인쇄하여 여분을 고가에 판매한 것이다. 이외에도 원래 족보가 없던 집안사람이 전쟁 등의 이유로 족보를 분실했다며 양반 집안의 족보에 자기들을 이어 붙이는, 소위 ‘붙임씨’를 하는 사례도 많이 있었다. 아버지가 ‘붙임씨’를 하려는 사람으로 모욕을 받은 이유이다.
뭐니 뭐니 해도 족보가 일반화된 계기는 1909년에 시행된 민적법(民籍法)이다. 민적법 시행으로 양민은 물론 노비와 천민들도 성을 갖게 되었다. 김 씨, 이 씨, 박 씨를 선택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주인의 성씨를 따르고, 족보 또한 주인 집안의 것을 썼다. ‘붙임씨’가 광범위하게 허용된 셈이다.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회원들과 대전의 뿌리공원과 족보박물관을 방문했다. 족보박물관에는 우리나라 244개 성씨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전부터 존재한 성씨가 대부분 반영된 것이다. 2000년 현재 통계청이 발표한 성씨는 286개. 오늘날 족보 없는 가정이 없고, 우리나라 국민 누구나 족보를 통해 본인이 양반의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 비중이 5%에 불과했다는데 지금은 모두 양반의 후손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성씨의 숫자는 급증하여 귀화인들이 창설한 성씨까지 포함하면 2015년 현재 5,582여 개에 이른다. 혹시 그들도 모두 족보를 만들었을까? 그들도 모두 양반의 후손이라고 주장할까?
대전의 뿌리공원과 족보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맨 먼저 떠오른 것은 ‘붙임씨’였다. 불타버린 족보를 복원하려 애쓰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족보박물관을 떠날 때 아련하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족보 소홀히 하지 말라고.
*공명첩(空名帖)은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려고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허직(명예직) 임명장(벼슬 문서)이다. 공명(空名)이란 “받는 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이란 뜻이다.
**민적법(民籍法)은 모든 백성이 남성 가장을 호주로 하는 직계가족을 구성하고 그 ‘호(戶)’의 민적에 등록되도록 의무화시킨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