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너무 좋아요. 그렇죠, 막돌 오라버니?”
윗도리 고름이 풀려 맨가슴을 살짝 드러낸 채 어깨에 한가득 땔감을 메고 숲에서 나온 막돌을 보며 여자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는 여자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며 땔감을 지게에 높이 쌓더니 손깍지로 뒷머리를 받치고 풀밭에 누웠다. 여자는 그 옆에서 남자를 내려다보는 자세로 바싹 엎드려 환하게 웃으며 종달새처럼 조잘거렸다. 영락없이 봄나들이를 나온 연인이 따사한 봄 햇살을 즐기는 그런 모습이었다.
여자가 엎드린 자세로 움직일 때마다 봉긋한 가슴은 남자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했고, 옷섶 사이로는 하얀 젖무덤이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한창 피가 끓는 젊은 사내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젖가슴이라니…. 사내의 아랫도리는 눈치도 없이 불끈 솟구쳤고, 두 손은 여자의 가슴을 향해 무심한 척 다가가려고 했다. 게다가 눈앞에서 조잘거리는 입술은 너무나 귀여워서 남들은 보지 못하게 자기 입술로 가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신분 차이가 분명해서 그럴 수 없는지라 사내는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오라버니, 앞으로도 나무하러 나올 때는 나를 데려와야 해요.”
마치 응석을 부리듯 말을 하는 여자는 강 대감의 막내딸 효생이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사람을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아 안방마님의 걱정거리가 된 딸이기도 했다. 안방마님은 그런 딸의 건강이 염려되어 막돌이 산에 나무하러 갈 때 데리고 나가 바깥바람을 쏘이게 했다.
“소인과 같이 다니다간 아씨 처지가 곤란해질 것 같아요. 그러니….”
“남들이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허락하셨는데 뭐가 문제예요? 산에 오르면 맑은 공기도 마시고 들꽃들을 볼 수 있어 답답한 마음이 후련해지는데…, 그러니 앞으로도 날 데리고 나와줘요. 그래 줄 거죠, 오라버니?”
안방마님의 지시를 받았다고는 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막돌은 가능하면 집에서 멀리 떨어지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나무하러 다녔다. 오늘도 마을에서 꽤 떨어진 산허리에 이르자 막돌은 양지바른 풀밭에 효생을 앉아 있게 하고 땔감을 찾아 숲으로 들어갔다. 효생은 수풀 사이로 설핏 보이는 그의 모습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마치 시선을 돌리면 그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다가 막돌이 땔감을 지고 숲에서 나오자 효생이 그의 곁으로 더욱 바싹 다가와 조잘조잘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라버니도 나랑 같이 있는 게 좋지요?”
효생이 환하게 웃으며 묻자 막돌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벗어나려고 몸을 살짝 비틀어 일으키며 대답했다.
“당연히 좋지요. 묵던에서도 고된 일을 하다가도 아씨랑 눈이 마주치면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는걸요. 전 아씨가 웃는 모습만 봐도 좋아요.”
갑자기 효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막돌도 아차 하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고 효생의 얼굴만 살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효생이 한숨 쉬며 말했다.
“고향 집에 돌아오면 모든 게 좋아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냥 묵던에서 살 걸 그랬나 봐요.”
묵던은 청나라의 서울인 심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효생과 막돌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다가 돌아왔다. 효생은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으나 막돌은 오갈 데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묵던에서의 인연 때문이었는지 그녀의 집에 종으로 따라 들어왔다.
“또 그런 소리 하네요. 나처럼 막 굴러먹던 놈이야 묵던에서도 살아갈 길이 있겠지만 아씨처럼 귀한 분이 노비로 천대받으며 살 곳은 아니지요. 지금이야 대감마님이나 서방님들이 묵던에서 아씨가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몰라서 저러지만 사실을 알고 나면 바뀔 겁니다. 그러니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더 참으세요, 아씨.”
묵던에서의 생활은 고됐다. 특히 양반집 딸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자랐던 효생에게는 견디기 힘든 곳이어서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효생이 묵던에서 돌아온 것을 후회하는 말을 꺼내곤 했다.
“묵던에서 기생 마님이 한 얘기가 생각나곤 해요. 예전에는 조선을 헐뜯으려고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나 오라버니들을 보면 마님이 한 얘기가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기다린다고 좋은 날이 올 것 같지도 않고….”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먼 곳을 바라보던 효생이 갑자기 무너지듯 막돌의 품에 안기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누르고 눌렀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모양이다. 막돌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닌 듯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막돌의 품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울던 효생이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또 못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해요, 오라버니. 갑자기 기생 마님이 묵던에서 언니 동생으로 같이 살자던 말이 생각나서 그랬어요. 차라리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또 그런 소리를…. 세상이 난리 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조금만 참고 견디시면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계속)
(진주남강문단 21호, 20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