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사방에서 막돌에게 몽둥이세례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매질에 정신을 못 차리는 막돌의 귀에 서릿발 같은 강 대감의 호령이 들려왔다.
“이놈! 나무하러 갈 때마다 상전을 꼬드겨 데리고 나간 이유가 무엇이더냐? 네놈의 음흉한 행동을 지켜본 사람이 있으니 어설프게 발뺌 말고 이실직고 하렸다!”
“음흉한 행동이라…니요?”
순간 막돌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울먹이는 효생을 달래려고 안아주는 것을 누군가 보고 일러바친 게 분명했다. 조금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방심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강 대감은 상전을 희롱한 죄를 물어 한참을 더 매질하게 한 다음 창고에 가두고 물 한 모금 주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효생이 깜짝 놀라 무릎을 꿇고 막돌을 변호하다 강 대감의 노기를 북돋고 말았다. 막돌을 오라버니라고 부른 게 화근이었다.
“네 이년! 어디 사대부의 자식이 종놈을 오라버니라고 부른단 말이냐?”
강 대감이 노발대발했지만 효생은 기죽지 않고 말했다.
“막돌 오라버니는, 아니 막돌은 소녀가 묵던에서 고초를 겪을 때 저를 지켜주고 감싸주던 은인입니다. 나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스스로 따라나섰고, 묵던에서의 인연을 끊지 않으려고 이 집에 종으로 자청해서 들어 온 겁니다. 딸을 무사히 데려왔는데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벌을 내리시다니요. 안 됩니다, 아버님. 막돌을 풀어주세요.”
효생의 항변에 강 대감은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발을 구르며 언성을 높였다. 청나라에 끌려가서 제 몸 하나 간수 못 하고 정조를 잃어 집안 망신시킨 주제에 종놈마저 감싸는 것이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효생이 단지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왔을 뿐 정조를 잃지 않았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찌 집안 망신시켰다고 하느냐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강 대감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듣기 싫다! 오랑캐에게 끌려가 몇 년 만에 돌아온 년이 무슨 면목이 있다고 말대꾸를 하느냐? 그것만으로도 집안 망신이고 수친데 근신은커녕 밖으로 나다니며 집안 명예를 더럽힌단 말이냐? 앞으로는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마라!”
강 대감은 여종들에게 허락 없이는 효생을 별당 문밖으로 못 나오게 하라고 명령했다. 강 대감이 혀를 차며 사랑으로 들자 마님이 급하게 따라 들어갔다.
“대감,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어찌 이리 매정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답답해하는 아이를 방에 가두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운데…. 효생에게 탈이라도 날까 걱정되어 제가 막돌에게 가끔 밖에 데리고 나가라고 명을 했습니다. 바람이라도 쐬어 그 아이 숨통이라도 트이라고요. 그러니 출입을 금하라는 명을 거둬주세요.”
마님의 사정에도 대감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딸년이 종놈에게 희롱당하는 것도 모르고 뭘 했느냐고 힐난했다. 마님이 앞으로 효생의 행실을 잘 다스리겠다고 사정했지만 대감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이미 몸을 버린 년이라며, 집안을 망신시킨 년이라며 노발대발했다. 오랑캐들이 조선 여자를 묵던으로 끌고 간 이유가 뭐냐고, 노리개로 삼으려고 그런 게 아니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정절을 지키려던 여인들은 묵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느냐고도 했다. 살아서 돌아온 여자들은 자발적으로 몸을 바친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이미 몸을 더럽힌 여자라는 것이다. 더욱이 효생은 사대부 집안의 여자로서 응당 목숨으로 이를 갚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인이 눈물로 호소했다. 전쟁 중에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모두 몸을 더럽힌 것은 아니잖느냐는 것이다. 떳떳한데도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고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여인이 얼마나 많겠냐고 항변했다. 효생이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라며, 오히려 억울해하고 있다며 자식을 믿어보자고 사정했다.
하지만 대감은 냉정했다. 설사 효생이 떳떳하다고 해도 그런 사실을 누가 믿어주냐는 것이었다. 몸을 더럽힌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를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쏘아붙였다. 정절을 지키려고 목숨을 끊은 여자들도 많은데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온 여자들은 정절을 잃은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보고 있다며 더는 효생을 감싸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습니까? 그래서 상감께서도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인들을 홍제천에서 목욕하게 하고, 목욕한 여인들의 정조 문제를 더는 거론하지 말라고 한 것 아닙니까? 나라님께서 그렇게 명하셨는데도 대감은 어째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상감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법도에 어긋나는 겁니다. 국법에 정절을 잃은 부녀자 가문은 자손 대대로 과거에 응시하거나 요직에 등용할 수 없다고 되어 있어요. 목욕했다고 해서 잃은 정조를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상감께서 국법에 어긋나는 잘못된 지시를 내리신 겁니다. 두고 보세요, 더 큰 혼란이 올 테니.”
대감이 생각을 바꿀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부인은 절망감이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막돌이 묵던에서 지켜줬다고 하니 효생이 정절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어보자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막돌이라는 이름이 대감의 화를 돋우었다.
“막돌이요? 근본도 모르는 종놈의 말을 믿으란 말입니까? 그리고 부인은 세상 물정을 몰라요. 고향에 돌아온 지 1년이 넘어서 낳은 자식도 호로(胡虜, 청나라를 얕잡아 부르는 말) 자식이라며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세상이에요.”
대감은 매정하게 부인의 말을 거절했다. 정조를 잃은 딸로 인해서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졌다고 분노하고 있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강 대감의 뜻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내들이, 나랏일을 한다는 대감들이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고통에 빠뜨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청나라의 공격을 물리쳤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느냔 말입니다. 잘못은 자기들이 해놓고 책임은 고초를 겪고 온 아녀자들에게 돌리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갑자기 쳐들어온 오랑캐 놈들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이오? 그리고 전쟁은 쌍놈들이 하는 것이지 양반이 하는 게 아니오.”
대감의 말에 부인이 발끈하며 말했다.
“쌍놈들이나 전쟁을 한다고요? 오랑캐의 칼날이 코앞에 있어도 종놈을 부르시겠단 말입니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정묘년 난리를 겪은 뒤에는 쌍놈들로라도 군사를 꾸려 나라를 지킬 생각을 했어야지요. 그게 조정의 녹을 먹는 대감들이 할 일 아닙니까? 그런데 뭘 했지요. 율곡인지 잡곡인지 하는 사람을 문묘에 모시는 문제에만 매달렸지 않습니까? 구차하게 변명하지 마세요. 제 자식 하나 지키지 못했으면서 아이에게 타박만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저 아이를 풀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내 자식 살릴 방도를 찾아야지요.”
마님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쌩하고 방을 나갔다. 정숙한 부인이었다. 목소리 한 번 높인 적이 없었다. 그런 부인이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거친 행동을 보이자 대감은 깜짝 놀랐다.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하는 부인의 말이 비수처럼 머리에 박혔다.
(계속)
(진주남강문단 21호, 20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