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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사나운 날

by 아마도난

생각이 짧았나 보다. 너나없이 단풍구경을 간다는데 생뚱맞게 억새를 보겠다고 민둥산을 찾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서울역 앞에 주요 관광지로 떠나는 당일치기 관광버스가 모여 있다는, 민둥산으로 가는 버스도 있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듣던 대로 대우빌딩 앞은 관광버스로 혼잡해져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뚫고 민둥산행 버스를 찾아다녔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가 떠나면 새로운 버스가 그 자리를 메꿨다. 그러기를 반복하는 동안 민둥산행 버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문에 난 광고에는 아침 7시 30분에 대우빌딩 앞에서 떠난다고 했는데, 그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마침 같은 여행사의 남설악행 버스가 눈에 띄었다. 버스 가이드에게 민둥산행 버스를 물으니 모객이 안돼서 일정이 취소됐다는 것이다. 이런 젠장! 꼭두새벽에 집을 나섰는데 버스가 없다니! 황당했지만 예약을 안 하고 나온 터에 누구를 탓하겠는가? 망연자실해 있는데 가이드가 지금은 설악산 단풍이 절정이라며, 버스에 자리도 두 자리밖에 남지 않았다며 넌지시 유혹한다. 아쉬웠지만 민둥산을 포기하고 남설악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선 여파였을까?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버렸다. 눈을 떴을 때 버스는 한계령을 넘고 있었다. 양희은의 ‘한계령’을 속으로 흥얼거리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계곡의 단풍을 감상하다 보니 버스는 고개 넘어 흘림골을 지나 ‘용소폭포 탐방지원센터’ 앞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용소폭포?” 왠지 낯설지가 않아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가이드가 이곳에서 모두 하차하여 계곡을 따라 하산하라고 한다. 계곡을 따라 단풍을 감상하며 1시간 반 가량 하산하면 오색약수터 관광단지가 있는데 그곳에서 각자 점심식사를 해결하란다. 버스는 오색약수 주차장에서 대기할 것이니 식사 후 늦지 않게 승차하라는 당부의 말도 덧붙였다.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다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여기야?” 2년 전 마누라와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주전골’이라 해서 왔던 바로 그 장소였다. 주전골은 조선시대에 화적들이 동전을 주조하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같은 장소를 두고 어떤 여행사는 ‘남설악’이라 부르고, 다른 여행사는 ‘주전골’이라 부르며 모객을 한 것이다. 여행사의 얄팍한 상술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생각이 짧은 자신을 탓해야 할까?


낭패스러웠지만 ‘용소폭포 탐방지원센터’ 앞에서 복장을 추스르고, 마음도 추스르고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계곡을 따라 펼쳐있는 풍경을 보노라니 “설악산 단풍은 몇 번을 봐도 멋지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얼마를 걷다가 이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 속에 담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찾았다. “어! 핸드폰이 없네?” 주머니에도, 배낭에도 어디에서도 핸드폰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젠장!” 탐방지원센터까지 뛰다시피 하며 다시 올라갔다. 올라가며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혹시 길에서 핸드폰 못 봤느냐고 물어봤지만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단다. 탐방지원센터 근무자에게 분실된 핸드폰 신고 들어온 거 없느냐고 물었지만 없단다. 마지막 기대를 갖고 내 핸드폰에 전화를 해 봤다. 버스 안에 떨어져 있기를 기대하면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허!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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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공중에 붕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선녀탕도 건성으로 지나가게 되고 아름다운 단풍도 시큰둥해 보이고……. 행여 하는 마음으로 눈은 바닥을 향하고, 머리엔 핸드폰에 저장된 그 많은 정보를 어떻게 복구해야 하나 하는 걱정으로 채워졌다. 아침부터 재수에 옴 붙었구먼. 민둥산 가려다 못 가고 남설악에 왔는데 남설악은 전에 왔던 주전골이고, 마음을 돌려 먹고 즐기려고 했더니 핸드폰이 사라지고, 되는 게 없는 날이네 하며 툴툴 거리며 하산했다. 오색약수까지 내려왔다. 관광단지 주변의 식당가에서 뭔가 요기를 해야 하는데 식욕이 전혀 없다. 머릿속은 여전히 핸드폰 생각으로 가득 차고……


맥이 탁 풀린 걸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가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핸드폰 잃어버렸죠?” 하고 묻는다.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내 자리에 떨어져 있더란다. 그대로 두었으니 확인해 보라 해서 자리에 가 보니 진짜 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전화벨이 울렸을 텐데 왜 받지 않았느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버스 문을 잠가 놓고 내렸기 때문에 못 들은 것 같다고 한다. 좀 전까지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던 마음이 활기로 채워졌다. 버스 출발시간이 촉박해서 근처에 있는 간이매점에서 간단하게 요기한 음식마저도 맛있었다. 하여튼 변덕스러운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버스는 오색약수를 떠나 양양 휴휴암으로 향했다. “휴휴암?” 낯선 이름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참 재미있는 이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休休菴! 무슨 뜻일까? 쉬고 또 쉬라고?” 바닷가에 자리한 휴휴암은 해수관음보살이 감로수병을 들고 연꽃 위에 누워 있는 형상의 암석 때문에 유래했다고 한다. 휴휴암 앞바다에는 잉어과의 일종인 황어 떼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황어들은 아침 9시면 출근하듯이 휴휴암에 나타났다가 저녁 6시면 퇴근하는 것처럼 사라진다고 해서 더욱 얘깃거리가 되고 있었다.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지혜 관음보살’에게 운수 사나운 오늘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비록 이번에는 민둥산 억새축제를 보지 못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리다. 걸어서라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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