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일이면 만나러 갑니다. 2년을 벼르고 벼른 끝에 가는 길입니다. 이른 아침에 기차를 타야 하니 서둘러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한데 조금만 더 읽으면 책장을 덮을 수 있었던 책이 잠자리에 들지 못하게 합니다. 마침내 다 읽고 나니 새벽 1시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책의 여운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게 합니다.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라는 책입니다. “한일 간에 국제적 갈등이 발생하면 전 세계에서 한국을 지지할 나라는 하나도 없다.”는 일본 우익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닐 것임을 필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라고 한국을 떠나면서 했다는 말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화들짝 놀라서 깼습니다. 핸드폰에 알람을 설정하고 잤는데 듣지 못한 겁니다. 호들갑을 떤 끝에 겨우 기차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청량리 역에서 목적지까지는 3시간 반이 걸린다고 하니 가는 동안 부족한 잠을 채우면 됩니다. 잠시 졸았나 싶었는데 주변이 시끄러워서 깼습니다. 열차 차장이 차표 검사를 하면서 어떤 승객에게 부정 승차라며 요금 외에 부과금을 더 내라고 실랑이를 하느라 나는 소란이었습니다. “그래 2년을 기다린 끝에 만나러 가는데 잠이 좀 부족하다고 졸면 안 되지.”하며 가을로 넘어가는 차창 밖 풍경에 눈을 돌렸습니다.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초입부터 경사가 장난이 아닙니다. “내가 매일 10여 Km를 걷는데 이까짓 것쯤이야!” 하며 힘차게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0분을 가지 못하고 주저앉았습니다. 의욕이 너무 앞섰나 봅니다. 목에 걸린 땀수건은 바쁘게 얼굴을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힘을 내어 오르다 보니 아줌마 7명이 앞에 가고 있었습니다. 뒤에서 보는 아줌마들의 엉덩이가 무척 무거워 보입니다. 거의 50M쯤 가다가 한 번씩 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분이 푸념을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연주암을 갔다가 집에 와서 보니 엄지발톱이 빠져 버렸더라고. 자식새끼가 뭐라고 재수하는 바람에 입시 잘 치르라고 치성드리려고 갔다가 그랬다니까!” 하는데 ‘자식새끼’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덕택에 잠시 농담하며 숨을 돌렸습니다. 이 여자분들 중도에 포기하고 하산해 버렸습니다.
몇 년 만에 산을 타다 보니 숨이 턱까지 차 오릅니다.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수 십 번도 더 드는 것을 누르며 무거운 발을 옮겼습니다. 중간중간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버려진 쓰레기.’라는 안내문이 눈에 띕니다. “재미있게 써 놓았네!” 하고 웃으며 지나쳤습니다.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나가다 보니 갑자기 숲길이 끝나고 앞이 확 트입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흘린 땀이 한 말은 족히 넘을 것 같은데, 그래서 몸이 가벼워졌는지 탁 트인 공간을 보니 갑자기 몸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마침내 만났습니다. 민둥산 억새밭입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반가워!” 하고 말하는 듯 억새들은 살래살래 손까지 흔들며 반겨줍니다. 억새가 이렇게 예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능선을 따라 산 꼭대기에 올라섰습니다.
정상에는 ‘민둥산 1,119 m’라고 새겨 놓은 표지석이 서 있었습니다. “뜨악 1,119미터라니!”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합니까? 이제 인증샷을 찍어야 합니다. 아! 그런데 아줌마들이 표지석을 점령하고 비켜주질 않습니다. 그리고 내게 묻습니다. “사진 찍을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구시렁거렸습니다. “그럼 내가 여기 왜 서 있겠수?” 하지만 겉으로는 친절한 미소를 띠며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한 아줌마가 친구들에게 소리 지릅니다. “여기서 인증샷 꼭 찍어야 돼. 안 그러면 남편이 낯선 남자랑 놀러 갔다 온 줄 알아.” 이건 또 무슨 소립니까? 하여튼 단체사진에, 독사진에, 좋아하는 친구랑 찍으면서 좀처럼 비켜주지 않는 아줌마들을 바라보며 인내심 테스트를 했습니다.
억새 밭에 아쉬움을 잔뜩 남기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내려오는데 오른쪽 신발이 이상한 신호를 보내옵니다. “뭐지?” 하면서 살펴보니 이런 맙소사! 신발 밑창이 뒤꿈치부터 신발 중간까지 떨어져 있습니다. 신발끈을 풀어 밑창까지 둘러매었습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왼발도 같은 신호를 보내옵니다. 기가 막힙니다. 어찌 이런 일이! 등산길이 아닌 하산 길에 이렇게 돼서 다행이야 하며 내려오는데 다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버려진 쓰레기.’라는 안내문이 눈에 띕니다. 그때 마침 등산화가 내게 속삭였습니다. “나를 버리지 마세요.” 속으로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너를 안 버려. 여기에서 널 버리면 발병 날 텐데?” 민둥산 역에 도착하니 오른쪽 신발 밑창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도 왼쪽 신발은 의리가 있었는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밑창이 붙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신발입니다.
재작년에 민둥산 억새가 멋있다는 말을 처음 듣고 길을 나서려다 ‘민둥산 억새축제’가 끝났다고 해서 아쉽지만 발길을 접어야 했습니다. 작년에는 민둥산 가는 관광버스를 타려고 아침 일찍 서울역에 나갔다가 모객이 안되어 일정이 취소됐다고 해서 못 갔습니다. 대신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것이 아까워 단풍이 예쁘다는 남설악행 버스를 탔습니다. 맙소사! 이 곳은 다른 여행사를 통해서 와 본 주전골이었습니다. 같은 곳에 거푸 온 겁니다. 게다가 그날은 핸드폰도 잃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찾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운수 사나운 날’이었습니다.
민둥산 억새는 10월 중순쯤 되면 더 예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전 만족합니다. 소원 성취했으니까요. 여기서 더 욕심부리면 남설악인지 주전골인지를 또 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