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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by 아마도난

“이 능의 자리는 용의 이마에 해당하는 명당자리라고 합니다.”


문화해설사가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을 과시한다. 슬쩍 찔러보았다.


“왕은 어려서 승하하여 소생이 없는데 누가 그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영월 사람들이 그 복을 다 받는다고 합니다.”


장릉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종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유머를 살짝살짝 섞은 재치 있는 입담으로 방문객들의 귀에 필요한 지식을 쏙쏙 넣어 주었다. 단종을 사사(賜死)한 세조는 시신을 동강에 버리고 이를 수습하는 자는 3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린다. 이런 살벌한 시기에 영월호장 엄 흥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눈으로 덮인 동을지산을 급히 오르다가 노루들이 쉬고 있던 자리만 눈이 쌓이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암장을 했다고 한다. 영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희망이었을까? 우연히 묻은 자리였는데 이곳이 명당자리란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산을 둘러보니 용이 기다란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풍수지리에서도 이 자리는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에 해당하는 명당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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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하룻만에 어머니 현덕왕후를 잃고, 12살에 아버지 문종이 승하하여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던 단종. 재위 3년 만에 계유정난을 겪으면서 세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 났다. 그 뒤 사육신의 상왕 복위 사건으로 인하여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금성대군이 주동이 된 ‘정축지변(丁丑之變)’으로 인하여 유배된 지 4개월여 만에 열일곱 살 어린 나이로 사약을 받고 승하했다. 엄 흥도가 높은 언덕 위에 급하게 암장한 장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우연이겠지만 소나무들은 비통한 죽음을 맞은 단종의 넋을 기리기라도 하듯 한결 같이 예를 갖춰 능을 향해 절을 하는 모양으로 굽어 있었다. 이 가운데 최근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의 능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가 승하한 지 500여 년만에 젊은 부부가 다시 만나 애틋한 정을 나누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장릉 쪽으로만 뿌리를 뻗고 있다고 한다.



소나무를 등지고 내려오면서 단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 왕 방연이 당시의 심경을 읊은 시조 한 수를 떠 올려 본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원래 수양대군은 조실부모한 단종에게 다정다감한 숙부였던 것 같다. 하지만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러니 누구든 권력과 가까운 거리에 있을 때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다툼도 당연히 발생하겠지. ‘계유정난’을 통해 왕권을 잡은 세조는 금성대군이 순흥부사와 함께 모의한 ‘정축지변’을 평정하면서 왕권을 공고히 하게 된다. 정축지변 당시 단종 복위 운동에 동조했던 순흥부(현재 영주 및 봉화 일대)의 선비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참살을 당했는데 멸족의 화를 피하려고 젖먹이들은 ‘청다리’ 밑에 버렸다고 한다. 그때 어렵사리 살아남은 아이들을 관리나 백성들로 하여금 데려다 기르도록 했는데 이때 이후 “넌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라는 말이 생겨 났단다. 그때 이후로 아이들이 “엄마 나 어디서 태어났어?”라고 물으면 엄마들은 농담처럼 “넌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라고 대답하게 되었다나? 하지만 그렇게 대답했다면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가 곧 충의지사의 후손(?)이니 그 엄마는 잘 키워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짧지만 고단한 삶을 살아 간 단종은 자규루(子規樓)에 자주 올라 자규루시를 읊으며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시름 못 잊어 누머리에 기대앉았어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 오르지들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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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은 죽어서 두견새로 환생하였다고 전해진다. 단종이 사사되자 궁중에서부터 시중을 들어오던 6인의 궁녀들도 동강의 낙화암에서 순절한다. 궁녀들의 영혼은 장릉에 와서 두견새로 환생한 단종에게 절을 하며 시중을 들었다고 하는데 이런 애달픈 내력을 간직한 배견정(拜鵑停)이 장릉 능선 끝자락에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새를 위한 정자’란다. 감동스러운 것은 정조 때 영월부사로 부임한 박 팽년의 후손 박 기정이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듣고 배견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박 기정의 감회가 얼마나 새로웠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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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엄 흥도를 기리는 정려문, 암장된 단종의 무덤을 찾아낸 영월부사 박 충헌 비각 등이 능원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 조사, 환관, 군노, 궁녀, 관비 등 264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장판옥(藏板屋)과 배식단(配食壇)이었다. 이들은 매년 4월 한식날 단종을 위한 제를 지낼 때 같이 모셔진다고 하는데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왕 이외의 인물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 개국의 주역인 정 도전은 왕이 아닌 신하들이 책임을 지고 나라를 경영하는 ‘신권 국가(臣權國家)’를 이상 국가로 꿈꾸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입헌군주국가’와 비슷한 국가체제였으리라. 신권을 강화하려다 보면 왕권을 강화하려는 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태종은 1,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정 도전 등 신권을 앞세운 개국공신 세력과의 권력다툼에서 이겼다. 세조도 그랬을까? ‘계유정난’을 병약한 문종과 나이 어린 단종 이후 다시 득세한 신권으로부터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권력투쟁으로 설명하는 견해도 있다. 이 같은 난세에 어린 단종이 희생양이 된 셈이다. 단종은 승하한 지 241년이 지난 숙종 때 복위되었다. 그 오랜 세월 어린 단종은 다리 밑 아이들을 보듬어 주고 어루만져 주며 지내지 않았을까? “넌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라는 말을 새삼 되새기며 단종을 추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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