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야속한 하늘이다. 모처럼만에 운길산 산행에 나서던 날도 가볍게 비를 뿌려 주더니 또다시 남산 둘레길을 걸으려 하는 날 비를 가져왔으니 말이다. 운길산을 가던 날은 새벽에 많은 비를 주었지만 날이 밝아지면서 거두어 갔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비를 몰고 왔다. 그래도 작정한 길. 잠시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이내 집을 나섰다. 서울시가 남산 숲길을 새롭게 개방하면서 ‘함께 남산’이라는 표어를 걸고 ‘제1회 남산 둘레길 걷기 축제’를 하는 날이어서 남들보다 먼저 새로 만들어진 길을 걸어 보고 싶은 욕심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산을 쓰기에도, 비를 맞기에도 애매한 가랑비를 맞으며 국립극장 뒤편에 있는 남산공원 북측 순환로 입구에 도착했다. 행사장에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비옷을 제공받아 알록달록한 행렬을 만들어 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우산을 받쳐 들었다. 오색의 물결에 휩싸여 포장된 도로를 100m쯤 걸어가니 새로 개방한 남산 숲길로 유도하는 입구가 나타났다. 남산이라는 선입관 때문인가? 포장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흙 길이 나타나는 바람에 잠시 당황했다. 더구나 비까지 내려 질퍽한 둘레길은 때때로 미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눈 앞에 펼쳐진 고운 단풍들이 심산유곡에라도 온 것처럼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들었는지 걷는 즐거움에 빠져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덕택에 곳곳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스마트폰을 꺼내 든 사람들 때문에 걸음이 지체되곤 했다. 진흙에 미끄러져 낭패를 당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무엇이 즐거운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이곳이 서울 한복판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거진 숲길에 곱게 물든 단풍이 사람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든 모양이다.
남산의 단풍은 정말 고왔다. 누가 그랬던가? 올 단풍은 가뭄 때문에 곱지 않다고. 그렇지 않았다. 매우 고왔다. 붉은색, 노란색들이 곳곳에서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그 숲 속을 걷고 있는 형형색색의 비옷 입은 사람들도, 원색의 야외용 겉옷을 입은 사람들도 단풍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숲길이 끝났다.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사람의 손을 많이 받은 풍경으로 바뀌었다. 바로 하이야트 호텔 앞쪽에 조성된 남산 야외식물원이었다. 잘 정돈된 공원에도 가을 색이 완연히 내려앉은 가운데 곳곳에서 단풍 든 나무들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여전히 가랑비가 내리고 있는 나무들 사이에 행사 진행을 보조하는 젊은 여자가 안내 팻말을 들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빗속에 계속 서 있다 보니 한기라도 느꼈던 모양이다. 그녀에게 웃으며 한 마디 해 주었다. “숲 속의 요정 같아요.” 그녀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면서 ‘감사합니다!’하고 화답해 왔다.
발 길 닿는 곳마다 단풍으로 치장한 남산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동안 아내가 남산이 아주 멋지다며 바람 쐬러 가자는 소리를 가끔씩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남산에 뭐 대단한 게 있느냐며 가볍게 거절하곤 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도심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소파로를 지나면서, 온 산에 불이 난 것 같은 붉은 단풍 숲을 보면서 마침내 자제하고 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주머니를 벗어난 스마트폰은 억눌린 욕망을 거침없이 분출하기라도 하듯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담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로마에서 아름다운 보르게세 공원을 보며 부러워했었는데 그보다 더한 풍경이 남산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시나브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아서인지 행사는 당초 예정했던 것보다 단축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끝까지 완주했다. 40여 년을 서울에서 살면서 미처 보지 못한 서울의 또 다른 면모를 보는 즐거움이 컸던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빗줄기가 조금씩 더 굵어지기 시작했고 바람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단풍이 전해주는 아름다움도, 서울의 새로운 모습도 좋지만 빗속을 걷는다는 게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비였는데 어느덧 번거로운 비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피로를 느끼기 시작한 탓일 게다. 마침내 처음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왔다. 행사 진행요원이 웃으며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건네주는 순간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게 웃으며 물었다. “완주하면 주는 기념품 없어요?” 그녀가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대 위에 올라가시면 제가 인증숏 찍어 드릴게요.” 그녀가 찍어 준 인증샷을 완주 기념품으로 받았다. 국립극장을 뒤로하고 집을 향해 걸었다. 발이 닿는 곳이 첨벙거렸다. 발 밑 웅덩이에도 하늘은 위로의 눈물을 내린 모양이다. 메마른 파삭한 목숨들이 활짝 활개 펴고 남은 생명의 물을 머금으라고, 파삭하게 마른 몸뚱이라도 흥건히 적셔 보라고. 가뭄에 지쳐 쓰러진 가을빛이 다시 일어서진 못한다 해도 이 비를 맞으며 마지막 숨결은 느끼고 떠나겠지. 이 비는 아직 남아 있는 가을 빛깔에게는 목을 축이게 하는 달콤한 순간도 주겠지? 하늘이 위로의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그 하늘에게 가을이 말하고 있었다. 메마르고 목마른 가슴에 차가운 빗물이 젖줄처럼 몸을 타고 들어올 때 따스한 어미의 온기가 스며들고 있다고. 가을은 말하고 있었다. 잠깐의 겨울잠을 자고 다시 오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