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4일씩 걷는 올레길 트레킹을 위해 1년 만에 제주에 다시 왔다. 올레길을 완주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제주에 오던 날, 첫 발을 제주공항에서 동쪽으로 띄었다. 올레 17길 중간점이었다. 그때부터 동쪽으로 걷기 시작해 올해에는 올레 14, 15A, 15B 그리고 16길을 걸을 예정이니 곧 첫 출발했던 제주공항에 닿게 될 것이다. 목표가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제주공항으로 회귀한 다음 섬으로 이어지는 올레길만 걸으면 기나긴 여정이 모두 끝난다.
이번 올레길은 월령 선인장 자생지에서 시작했다. 올레 14길의 중간지점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백년초가 지천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곳곳에 백년초 가공시설들도 있었다.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백년초 초콜릿 등 가공식품들이 가득 보이던 이유가 비로소 이해됐다. 바닷가로 들어서자 백년초들이 곳곳에서 군락을 이루며 선인장 자생지라는 말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님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자라는 선인장은 멕시코 원산이라고 한다. 전래된 경로가 확실치는 않지만 대만이나 일본 혹은 동남아 등지에서 바닷길을 따라 월령리까지 흘러들어와 뿌리내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쁘다를 연발하면서 발길을 재촉하다 보니 문득 해녀콩 자생지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바닷가 모래에서 척박하게 살아가는 제주 해녀들의 삶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점심을 먹으러 들른 식당 주인은 토박이라면서도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고 고개를 저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다. 식당 주인이 남자여서 몰랐던 것은 아닐까? 제주 여인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가 있다.
요 바당에, 요 물에 들언/ 좀복, 구젱기, 고득하게 잡아당/ 혼 푼, 두 푼, 모이단 보난/ 서방님 술깝에 몬딱 들어 감쩌.(남편을 원망하는 해녀의 노래)
여기 바다에, 여기 물에 들어가서/ 전복, 소라, 가득하게 잡아다가/ 한 푼, 두 푼, 모이다 보니까/ 남편의 술값에 모조리 들어가더라.
제주도 여인들의 삶은 육지 여인들의 삶과 비교해도 특히 고단했는가 보다.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가졌을 때 해녀들은 해녀콩을 먹었다고 한다. 해녀콩에 독성이 있어서 아이를 떼려고 그랬단다. 그런데 얼마 큼을 먹어야 할지 몰라 너무 많이 먹어서 목숨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하니 해녀콩은 여인의 한을 알알이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해녀콩의 꽃말은 ‘전설’이라고 한다. 왜 전설일까? 현실의 고달픔을 잊고 제주도에서 멀지 않은 전설의 낙원 '이어도'에 가고 싶어서 일까?
자생하는 선인장처럼 해녀콩도 종자가 일본이나 대만에서 해류를 타고 흘러들어와 월령리 일대에서 서식하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도의 선인장이나 해녀콩은 뛰어난 환경 적응력과 질긴 생명력을 지닌 존재임에 틀림없다.
해녀의 한숨이 바람이 되고 눈물이 비가 되었는지 궂은 날씨가 심술을 부렸다. 우산을 받쳐 들고 비양도를 바라보며 금능, 협재해수욕장을 지나고 한림읍을 통과해서 예약해둔 콘도에 도착했다.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침대가 3개나 되는 방으로 업그레이드해줬다고 생색이다. 둘이 자야 하는데 침대방이 3개나 되면 어쩌라고. 밤새 방을 순회하며 잘 수도 없고....
제주도를 둘러싼 환경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밀물처럼 몰려오던 관광객도 줄었고 제주 한 달 살기 같은 극성도 사라졌다. 숙소가 남아돈다고, 숙박시설 경영난이 심각하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제주도 물가가 비싸다고, 차라리 해외로 나가는 게 더 실속 있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아름다운 제주도가 월령리의 선인장이나 해녀콩 같은 질긴 생명력으로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