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걷기를 마감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날. 새벽부터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마지막 날 걸어야 할 곳은 벌판과 바닷가가 대부분이어서 도중에 거센 비바람을 만나면 마땅히 피할 곳이 없었다. 하필이면 이런 날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늦은 밤 시간으로 예약해 놓다니….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예전에 폭풍우를 무시하고 광치기 해변을 걷다가 낭패를 당했던 일이 떠올라 빗길에 나서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식당 주인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뜻밖에도 그는 오늘 같은 날 올레길을 걷는 게 운치 있지 않느냐며 걸을 것을 종용했다.
마침 비가 잦아들면서 봄비답게 가늘어졌다. 숙소를 나섰다. 올레 안내서에 과장스럽게도 지평선을 볼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는 밭을 지나 수월봉, 엉알길 그리고 생이기정 바당길을 지나 용수포구까지 가는 17Km의 여정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제주 날씨는 우리를 곱게 걷도록 놔두질 않았다. 갑자기 열대지방의 스콜처럼 세찬 바람과 함께 거세게 비를 뿌리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멈춰버리기를 반복했다. 비를 피할 곳 하나 없는 벌판에서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난감한 마음으로 앞을 보니 오름 두 개가 보였다. ‘설마 저 오름 두 개를 다 넘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가능하다면 낮은 오름을 넘어가기를….’ 하늘이 간절한 기도를 들어준 것일까? 올레길은 낮은 오름 쪽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그때 멀리서 다시 다가오는 검은 구름을 보며 ‘오름을 포기하고 낮은 길로 돌아서 갈까?’하고 잠시 망설였다.
겨우 유혹을 뿌리치고 정상에 올라보니 수월봉이었다. 그리고 발아래로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높이가 77m에 불과한 낮은 오름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장엄하기조차 했다.
맙소사! 우회했더라면 이런 멋진 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 아닌가?
바다에는 두 개의 섬이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안내판에 다가가는 순간 또다시 세찬 비바람이 불어왔다. 비바람이 몰고 온 폭풍우는 눈앞에 있던 섬을 삽시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들었고 입고 있던 우비의 작은 틈새를 파고들어 옷마저 축축하게 적셨다. 비가 멈추자 바다는 눈앞에 보이는 섬을 삼켜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거칠게 출렁거렸다. 눈앞에 보이는 섬은 차귀도와 누운섬이었는데 18,000년 전 수월봉과 두 섬 사이의 바다에서 해저 화산이 폭발했다고 한다.
수월봉 아래 바닷가에는 엉알길이 있다. 엉알은 ‘높은 절벽 아래 바닷가’라는 의미의 제주방언인데 절벽에는 폭발로 날아든 화산탄이 촘촘하게 박혀 있고, 바닷가에는 주상절리가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끌었다. 이곳은 지질학의 보고였고 자연이 만든 예술품이었던 것이다. 이런 멋진 곳을 우회하려 했다니….
엉알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 흐르는 약수 물을 볼 수 있는데 슬픈 전설이 전해 온다. 어머니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오갈피를 찾아 수월봉 절벽을 오르다 누이 수월이가 떨어져 죽었다. 누이가 죽자 동생인 녹고도 슬픔에 빠져 하염없이 울다 죽고 말았다. 그 후로 사람들은 수월봉 절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고 불렀고, 수월봉을 ‘녹고물 오름’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남매의 효심이 갸륵해 그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녹고의 눈물’을 마셔보려 했지만 ‘마시지 말라’는 경고문에 물러서고 말았다.
바닷가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엉알길은 곳곳에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며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특히 이곳에서 보는 낙조가 일품이라는데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으며 차귀도 포구에 이르니 아담한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고흐를 좋아하는 쥔장이 내려주는 따뜻한 커피의 향긋함을 음미하며 차귀도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쉬다 보니 더 이상 걷기가 싫어졌다.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워서 더 그랬나 보다. 종점인 용수포구까지 가려면 당산봉을 지나야 하는데 쥔장에게 그곳을 피해 우회해서 가는 길을 물으니 당산봉이 높지 않고 그곳에 있는 생이기정바당길이 올레 12길의 하이라이트라며 웬만하면 가보라고 권했다.
이런, 이런, 이런! 이렇게 멋진 길을 두고 우회하려 했다니. 생이기정 바당길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환상적이었다. 이곳에는 가마우지와 같은 바닷새가 서식하는 곳으로 생이는 ‘새’라는 뜻의 제주방언이고 기정은 ‘절벽’이라는 방언으로 생이기정 바당길은 ‘새가 사는 절벽 바닷길’이라는 뜻이란다. 맑은 날씨였더라면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멋진 곳이었다.
수월봉과 엉알길
넓은 벌판에서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을 때만 해도 수월봉과 당산봉 중 한 곳만, 그곳도 낮은 오름을 지나기를 원했다. 아니 두 곳 모두 우회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랬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비경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잔꾀 부리지 않고 제 길로 간 덕에 제대로 보았다. 제 길로 가니 아름다움도 축복을 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