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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제주 올레 모슬봉

by 아마도난

정상에 커다란 분화구를 품고 있는 저지오름. 2007년 산림청이 주관하는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곳이다. 이곳은 올레 13, 14 및 14-1길이 시작하거나 끝나는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저지오름


정상 부근에는 분화구를 따라 걸을 수 있는 둘레길도 있고 분화구 바닥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단도 만들어져 있었다. 제주에 있는 많은 오름 가운데 희귀한 곳이어서 자연유산으로서의 가치도 있을 것 같았다. 정상에서 분화구 바닥을 내려다보니 숲이 무성했다. 전문가라면 흥미 있는 곳이겠지만 문외한의 눈에는 평범한 숲처럼 보여 발길을 돌렸다. 대신 정상에 마련돼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그렇게 높은 오름이 아닌데도 한라산, 산방산 그리고 한림읍이 한눈에 들어왔다. 멋지다.

수백만 년의 나이를 가진 저지오름 허리춤에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각자 지니고 있을 사연들을 분화구에 쏟아두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많은 분묘들이 있었다. 조성한 지 꽤 된 듯 화산암으로 사성을 두른 묘도 있고 시멘트로 만든 산 담도 있었다. 물론 산담이 없는 무덤도 있었다.




산 담은 산소나 밭 등을 화산암으로 둘러싼 낮은 담으로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산담으로 둘러싼 무덤 (자료 : 제주시)






저지오름을 구석구석 돌아보고 올레 14-1길 트레킹을 시작했다. 볕이 따가운 데다 저지오름에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했는지 걷는 내내 무척 힘이 들었. 걷기를 포기하고 택시를 부를까 하는 생각도 들곤 했지만 오기로 걸었다. 그때 문득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는 삶의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며 살아왔지요. 올레길마저 그렇게 걸을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걷다가 힘들면 쉬면 됩니다." 사실 쉼 없는 삶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닌데.... 해 질 녘에 지친 몸을 끌고 숙소에 돌아왔더니 체력이 방전되었는지 온 몸이 송장처럼 축 늘어져버렸다.

다음날 모슬포의 하모 공원에서 올레 11길 트레킹을 시작했다. 숙소에서 하모 공원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다. 시가지를 벗어나 인근의 모슬봉 자락에 도착하니 사방이 마농(마늘의 제주도 방언) 밭이다. 그리고 그 밭이 끝나는 곳에서 불쑥 묘지들이 나타났다. 어느 블로거가 '마늘밭이 끝나니 무덤들이 나타나더라'라고 표현했는데 영락없이 그 모습이다. 혹시 제주에 있는 18,000여 신(神)들이 후계자를 끌어들이려고 경쟁(?)하느라 생긴 결과인가?





저지오름에서 봤던 무덤들을 떠올리며 버스기사에게 이 지역에 무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지 즉시 대답을 해줬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알뜨르 비행장 일대에서 일제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4•3 사태 때에는 제주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슬포 일대에서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알뜨르'는 '아래 벌판'이라는 뜻을 가진 예쁜 제주 방언으로 모슬봉 아래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름이 이토록 예쁜... 그 알뜨르를 품고 있는 모슬봉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던 것이다. 질곡으로 가득한 삶이었을 텐데도 그 저편인 죽음으로 가는 것이 그토록 억울했을까? 공동묘지를 지나는 길을 'Dark Road(어둠의 길)'라고도 부른다는데 그 말에 왠지 눈물이 났다.

모슬봉 일대에는 가족 공동 묘도 많이 눈에 띄었다. 육지의 선산과 같은 역할을 하는 듯했다. 망우리 공동묘지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 이곳의 공동묘지. 곳곳에 가족납골당도 제법 보였다. 방치된 묘, 이장하려고 그랬는지 파묘된 곳 등도 산재해 있었다. 삶이 다양하듯 죽은 다음의 세계도 제각기 다른 모양이다.



모슬봉에서 바라 본 산방산. 한라산 분화 당시 백록담에 있던 봉우리가 폭발과 함께 날아와 생긴 산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사랑하는 사람을 느껴보려고, 다시 보려고 해도 돌아올 수 없는 곳이 죽음일진대 그 거리는 우주 끝보다 더 먼 곳이 아닐까? 쉬었다 가려고 앉았던 모슬봉 기슭에서 개똥철학을 또 한 번 되새겼다.





산방산을 바라보며, 알뜨르를 내려다보며 준비해 간 점심식사를 했다. 간단한 식사였지만 면에 드신 분과 '농사의 신' 자청비에게 '고수레'하며 나누어 먹어서 그랬을까? 식사를 마치니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져서 올레 11길의 하이라이트라는 무릉 올레로 힘차게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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