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는 볼거리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찾아가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볼거리는 좀처럼 가지 않는다는 말이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서울에서 살아온 지 40년이 넘었고, 근처를 지나간 횟수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정작 운현궁에 들어 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선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국정의 중심이었던 곳. 가슴속에 뜨거운 야망과 무서운 복수심을 품고 세월을 기다리던 사내가 웅크리고 있던, 그래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운현궁을 처음 찾았다.
살아가기가 어려워서였을까 아니면 무지해서 그랬을까? 흥선대원군의 손자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운현궁의 상당 부분을 팔아버려서 궁궐에 버금갈 정도로 거대했던 저택이 지금은 노락당(老樂堂)과 노안당(老安堂), 이로당(二老堂) 등 한옥과 양관(洋館)만이 남았고 운현궁의 일부를 사들인 덕성여대 등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본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져 아쉽기는 하지만 남아 있는 건물만으로도 왕실 가족이 살던 집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알아채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대학에 다닐 때였다. 덕성여대를 다니는 여학생을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가슴 아픈 짝사랑을…. 여학생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남자를 만나주지 않았다. 어느 날, 친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학생을 만나야겠다고 작심을 하고 아침부터 정문 앞을 지켰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교할 때까지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여학생이 보이질 않자 친구는 그 여학생이 하교하다 자기를 먼저 발견하고 학교 안 어딘가에 숨었다고 생각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여학생을 찾아내려고 금남(禁男)의 구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정문을 막 통과하자 그렇지 않아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던 수위가 바로 제지했고, 친구는 제지를 뿌리치고 냅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다음부터 친구와 수위의 쫓고 쫓기는 달리기가 캠퍼스 내에서 벌어졌다. 나이 든 수위의 직업정신이 어찌나 투철했는지 친구는 캠퍼스를 구석구석 쉼 없이 달리고 나서 정문으로 되돌아 나온 뒤에야 쫓김을 끝낼 수 있었다. 나중에 이 소동을 전해 들은 여학생이 마지못해 친구를 만나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운현궁의 봄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다.,
옛이야기가 떠올라서였는지 운현궁에 발을 디디는 순간 가장 먼저 머리에 떠 오른 것은 금동(琴童)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이었다. 이 소설은 운현궁의 주인인 흥선대원군의 일생과 조선말의 복잡한 내외 정세와 풍운을 그린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소설이다. 금동은 은인자중 하던 대원군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뒤 야망을 펼치면서도 민초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서술하는 등 그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지나친 영웅화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키려고 동분서주한 희대의 풍운아였을까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구시대의 인물이었을까?
베트남의 고도 후에(Hue, 化)를 여행하다 가슴 아프게 바라본 유적이 있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12번째 왕인 카이딘(啓定) 황릉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평을 받는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 카이딘 황제는 매년 국가예산의 30%를 쏟아부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조국을 프랑스에 팔아넘기고 민중들은 프랑스에 착취당하고 있는데, 궁전에서 화려한 생활만 하고 있다."며 폭동까지 일으켰지만 카이딘 황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1년 동안의 대역사 끝에 능을 완공했다.
화려한 카이딘 황릉을 보며 경복궁을 중건한 흥선대원군이 떠올랐었다. 카이딘도 흥선대원군도 왕실의 권위를 높이면 백성들이 결집되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세상은 그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꾸로 몰락을 촉진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 돈으로 군사력을 키우고 경제를 일으켰더라면 조선에도, 운현궁에도 봄이 왔을 텐데…. 판단 착오로 인해 운현궁도 경복궁도 엄동의 계절을 보내야만 했다.
흥선대원군도 친구도 그리고 그 누구도 아름답고 세련된 운현궁에서 봄을 맞이하지 못했다. 정녕 운현궁에는 봄이 없는 걸까? 아니다. 이제부터는 운현궁의 대문을 활짝 열고 이곳을 따뜻한 봄기운으로 가득 채워야겠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또다시 불행한 역사를 맞을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