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Nov 20. 2023

집에 앉아 미국 회사에서 일하기

원격 근무의 달인이 된 이야기

남들은 코로나19 때부터 원격 근무를 조금씩 하기 시작한 경우가 많다지만, 나의 경우는 원격 근무만 벌써 10년이 되어 간다. 그것도 미국, 홍콩, 한국의 세 군데에서 원격으로 같은 회사에서 일했으니, 원격 근무에는 웬만큼 자신이(?) 있다. (자신 있을 건 또 뭐람) 오늘은 나의 원격 근무 10년 일기.



어리버리 한국인, 미국 스타트업의 인턴이 되다

따지고 보면 내가 우리 회사에 자리에 얻은 건 나의 막무가내 정신 덕이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을 따라 간 미국. 그 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떴다. 공부나 일을 하고 싶었던 나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기가 나오기 전에라도 뭔가 하고 싶었다. 뭔가 해야겠다 싶었다. 아무리 작은 자리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예전에 일했던 분야(기후변화 컨설팅)와 아주아주 조그만 교집합이라도 있으면 무슨 포지션이든 지원했다.


다행히 그곳은 스타트업의 성지인 실리콘 밸리였고, 취업 사이트에는 구인 공고가 흘러넘쳤다. 경력이 2년 남짓이고 석박사 학위도 없는 외국인으로서는 대부분 그림의 떡이기는 했지만... 일단 급한 대로 보수가 없는 비영리기관에서 일을 시작하고, 일을 하면서도 쉬지 않고 각종 기관에 레쥬메와 커버레터를 넣었다. 그때, 전 직원이 다섯 명도 되지 않는 작은 회사에서 여름 몇 달 정도 인턴을 구한다는 공고가 눈에 띄었다.


그 회사는 내가 연락한 수많은 회사들 중 유일하게 바로 답을 해 줬다. 전화 면접을 보자고 했다. 후닥닥 웹사이트에 있는 정보를 긁어모아 공부를 했다. 솔직히 대체 뭘 하는 데인지 잘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야 미국의 전력 시장 구조나 리베이트 제도에 대해 빠삭해졌지만 당시는 전력 회사라고 하면 한전밖에 몰랐다) 그래도 회사 웹사이트와 CEO의 링크드인, 고객사 웹사이트 등을 열심히 뒤져서 대충 아는 척이라도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전화 면접은 차 안에서 봤다. 왜 차에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도 비영리 기관에서 일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다 조용한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나마 영어는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외국어였지만, 공적인 일로 영어를 하는 건 처음이다 보니 내 생각처럼 말이 잘 안 나왔던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열심히 떠드니 CEO는 마음에 들었는지 사무실로 와서 대면 면접을 보자고 했다. 뭔가 한 단계라도 나아간 것 같아 기뻤다.


지금은 렌트가 어마어마하게 비싸져서 방을 뺀 지 오래지만, 10년 전만 해도 우리 회사는 멘로파크 다운타운에 있었다. 작은 사무실에 책상이 두어 개 있고, 작은 회의실이 있었다. 일하는 사람이라고는 CEO, CTO, 엔지니어 한 명과 나의 상사 한 명에 불과했다. 마케팅과 세일즈는 미국 타주에 사는 다른 사람이 담당하고 있었고, 데이터 관리하는 팀이 인도에 하나 있다고 했다.


대면 면접은 전화 면접과는 달랐다. 바로 자기 회사의 시스템을 보여주더니 갑자기 숙제를 내줬다. '퀴즈'라면서 이걸 풀어 오면 합격시켜 주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성실도 테스트였던 것 같다. 우리 회사 서비스는 미국 우편번호(zip code)를 베이스로 제공되는데, 따라서 각 전력 회사의 영역 파악이 핵심이다. 이건 전력 회사 협조를 통해 구할 수도 있지만, 지도를 보고 손으로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시험은 지도를 보고 우편번호를 일일이 찾아내는 것이었다. 시간은 이틀 정도 줬다.


집에 와서 열심히 숙제를 했다. 친구는 인턴 하나 뽑는데 뭐 그렇게까지 하냐고 했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내게 주어진 경험이라면 무슨 잡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이사 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우리 집 우편번호도 간신히 외우는 판이었지만, 난생처음 보는 지역의 우편 번호를 열심히 리스트로 만들어 가져갔다. 다행히 결과는 합격이었다. 꾀부리지 않고, 의미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해 간 것이 나름대로 합격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미국 회사에 출근 해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출근했던 시절이 참 재미있었다. 일단 한국 회사랑은 너무너무 달랐다. 각자 일하고, 점심도 각자 먹고, (목요일은 보통 같이 먹었다) 수/금은 모두 재택근무를 했다. CEO는 바로 근처가 집이라서, 반바지에 슬리퍼 끌고 왔다가 개 밥 준다고 일찍 퇴근하곤 했다. 사정이 생기면 일찍 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배우자나 파트너가 가끔 사무실에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었다.


업무 상의 영어는 약간의 적응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상사가 어떤 부분을 "flag"해달라고 했는데, 대충은 알겠는데 정확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몰래 구글링 해보기도 했다. 유틸리티사에 전화하거나 고객사에 대응하는 건 대부분 상사가 했지만, 가끔은 내가 직접 해야 했고 무척 떨리는 경험이었다. 일단 퍼스트네임을 무조건 까고 들어가는(!) 문화가 어색했다. "안녕, 내 이름은 존인데 나 좀 도와줄 수 있니?" "응, 존, 뭔데?" 이런 문화인데, 나의 이름은 그들에게 낯설었고 굳이 스펠링까지 말해가며 통성명을 하는 과정이 힘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도 처음엔 긴장되어 쉽지 않았다.


가끔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간혹 그들은 한국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곧 야구 얘기라든가 자동차 얘기라든가 소소한 일상 얘기를 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곧잘 대화를 잘하는 나였지만, 모두가 원어민이고 나만 영어가 외국어인 경우는 약간 달랐다. 문화 코드도, 농담도, 표현도 익숙해지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내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라는 생각이 들어 즐거웠다. 다행히 직원들은 모두 친절했고, 나를 인턴보다는 정직원처럼 대우해 주었다.  



지루한 원격 근무가 시작되다

아기를 낳으며 이 회사와는 작별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기를 키우며 나도 파트타임으로 석사 학위를 밟기 시작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인턴을 그만둔 지 1년도 되지 않아, 회사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아기가 자는 시간 동안 1-2시간이라도 원격으로 일을 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어차피 예전에도 수/금은 재택근무를 했기에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시간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건 아니고, 내가 시간 되는 만큼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렇게 나의 원격 근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중간에 비자 문제와 국제 이사로 일을 못 하게 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홍콩으로 이사 간 뒤에도 회사는 다시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다른 사람을 구해 트레이닝을 시키는 것보다 익숙한 사람을 계속 쓰는 것이 회사 측에서도 편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아이를 키우고 국제 이사를 하는 시기에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보다 이 회사에서 쭉 일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홍콩 시기부터는 벽을 보고 일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일어난 시간에 회사가 있는 곳은 저녁이고, 모두 퇴근하고 집에 가서 잠을 잔다. 주섬주섬 찻잔을 챙겨 모니터 앞에 앉으면, 나만 혼자 외로이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콩의 삶에도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하고, 회사의 업무도 딱히 바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럼에도 나는 버텼다. 내가 공부했던 것, 기후변화와 에너지 정책과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건 아니지만, 이 회사의 업무는 커다란 그림 속의 아주 작은 조각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더 나은 옵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키우며 하기에 이만한 일도 없다는 생각이 컸다. 재미있지는 않지만 일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한 켠을 내어 열심히 글을 썼다. 언젠가는 내가 하는 일과 내가 쓰는 글이 서로 닿기를 바라며.  



회사 안에서 내 자리를 찾다

그렇게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이런저런 잡일을 맡아하던 나는 이제 어느 정도 회사 안에서 하는 업무가 정해졌다. 회사 안에서 자리를 잡는 느낌이 비로소 들었다. 서로 직접 얼굴을 본 지는 까마득하지만, 홍콩에서 둘째를 낳았을 때 회사에서 꽃다발과 인형을 보내줄 만큼 상사와도 인간적인 정이 쌓였다. 내가 해야 하는 일만큼은 칼같이 지켜서 하고, 낮과 밤이 반대여도 소통에 크게 지장이 없기에 앞으로도 큰일이 없다면 (회사야 영원하렴) 이 회사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내가 쓰는 글도 조금은 빛을 보았다. 글이 쌓여 첫 출간을 하고, 출간 소식은 회사에서도 기뻐해 주었다. (부사장님이 영문판은 언제 나오냐며 물어봐 주심..네??) 아직은 나의 일과 글이 완전히 맞닿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교집합이 커져 간다. 어떤 일이든 나의 몫의 일을 꾸준히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을 수 있는지 요즘 깨닫는다. 또 번외로 깨달은 바가 있다. 구인 사이트를 조급한 마음으로 뒤지던 예전에는 '일만 하면 행복하겠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 일은 일이고, 삶은 삶이다. 그래도 나는 요즘 행복하고, 감사하다. 아직도 다들 잠든 시간에 나는 홀로 일하지만, 벽을 보는 느낌은 아니다. 벽을 보면서도 열심히 창문을 뚫어서일까.


당장은 답답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내가 10년 간 얻은 작은 교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극 F라 미안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