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썰을 읽다 보면 진짜 뒷목 잡는 직장 스토리가 많더군요. 특히 진상 동료나 갑질 상사 때문에 겪는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이렇게 패기 있게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 다들 한 번씩 느껴 보셨죠?
그런데 사실 저에게는 이럴 일이 없습니다. 비결이 뭐냐고요?
.... 사실상 함께 일하는 동료가 없기 때문이지요. 껄껄.
제가 일하는 방식을 보면 이렇습니다.
고객사/뉴욕: 이번 프로젝트 AAA를 BBB 해줄래?
엘라/부사장/미시건: 물론이지, 다음 주까지 해줄게. 다이앤, 이거 해 줄 수 있지?
다이앤/디렉터/캘리포니아: 오케이, 앤드류, 훈, 이렇게 하자.
앤드류/엔지니어/캘리포니아: 갓 잇. 지금 합니다.
====8시간 경과====
훈/계약직/한국: 오케이!
다른 사람들: (묵묵부답. 내일 대답 예정)
진상이고 뭐고, 실시간 소통이 거의 없죠. 회의를 해 봤자 한 달에 한 번이니, 저는 묵언수행하듯 모니터 앞에 앉아 일을 한답니다.
외롭다...
저는 E 중에서도 파워 E인 편인데,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일을 하는 건 참 외로운 일입니다. 동료랑 외근 가고 밥 먹고 들어오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진짜 직장인들은 그러더군요.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요. 직장 내 인간관계가 얼마나 골치 아픈데, 할 일만 딱 하고 그 이상 안 엮이는 게 소원이라고 말이죠.
사실 그 말도 맞아요. 하지만 저는 단순히 친목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친목으로만 따지자면 아이 친구 엄마들을 간혹 만나니 어느 정도 충족이 되거든요. 그보다는 저의 세계가 확장되지 못하는 느낌이 드는 게 더 문제인 것 같아요. 같이 입사한 누구누구는 어디로 이직했다더라, 어디로 이직했던 누구는 자격증을 따서 프리랜서로 전향했다더라, 이런 식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면 살림이나 학원에 관련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분명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의 네트워킹에서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저는 늘 집에 있으면서도 집안일이나 아이 교육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일을 하면서도 업무 관련으로 만나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전업맘 사이에서도, 워킹맘 사이에서도 완전히 세상을 공유하지 못한 채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요즘입니다.
재택근무 맘들은 왜 드물까
또 한 가지, 재택근무를 하며 느낀 점이 있습니다. 외국에 살 때는 재택근무로 일하는 엄마들이 그래도 꽤 있었습니다. 특히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사무실 출근을 안 하는 옵션이 분명 강화되었죠. 그때는 한국도 그랬으려나요? 그런데 제 주변만 그런 건지, 재택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가 별로 없는 것인지, 주변에 재택으로 일하는 엄마들이 매우 드문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 것도,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둘 다 엄청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는 일이나 공부를 하지 않는 시기에는 답답한 마음이 들어 너무도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살림이나 육아에서 오는 보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회적 인정이나 경제적 보상에서 오는 보람과 질적으로 달랐기에 답답함이 충족되지 않았죠.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아예 나가서 일할 생각을 하면 그 또한 불안하고 내키지 않았어요.
재택근무에도 장단점이 있지만, 이런 제게 재택근무 가능한 직업은 하나의 정답이 되어주었습니다. 일의 재미나 보수, 이직 가능성 등은 모두 뒷전이었어요. 아이가 아플 때 바로 픽업할 수 있는 것 하나만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아이가 더 크면 학교에서 돌아올 때 엄마가 맞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을 테지만 (더 좋아할 것 같다...) 저는 그냥 제가 좋아서 아이를 맞이하고 싶거든요.
항상 재택의 형태여야 하는 건 아니죠. 필요할 때만 자유롭게 집에서 일할 수 있어도 그게 어딘가요? 다른 나라들은 코로나를 겪으며, 아니 그전에도 워킹맘들은 어느 정도 유연한 스케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미국에 사는 언니도 아이가 아프거나 학교를 못 가는 날엔 형부와 번갈아가며 재택근무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책을 읽다 보니 프랑스는 수요일마다 어린이들이 학교를 안 간다고 해요. (홍콩에서도 수요일마다 단축수업을 하는 국제학교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수요일이 되면 학부모들이 바쁘다. 수요일은 엄마들이 회사에 가지 않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한국 회사에 비해서는 프랑스 회사는 최대한 직장맘에게 아이와 관련된 시간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하는 편이다.
- 모니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프랑스 아이들> 중
물론 사정이 안 되는 부모들은 베이비시터를 고용하거나 수요학교 프로그램에 등록하기도 하지만, 수요일에 밖에 나가면 평소 출근하는 엄마들이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자주 볼 수 있다고 해요. 재택근무가 가능하다 해도 눈치를 보거나 실제로 이용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을 텐데, 좀 더 보편화되면 좋지 않을까요?
재택근무가 쉽지 않은 이유는 사실 제가 느끼는 단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대면 업무만이 가지는 장점이 분명 있거든요. 업무마다, 업종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직접 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경우도 많을 거예요. 다만 출산율이 유례없이 떨어진 요즘, 워킹맘과 전업맘 중간 어디쯤에서 나만의 세계를 이어갈 수 있단 건 분명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닥닥 아이를 등교시키고 출근하며 퇴사를 꿈꾸는 엄마들도, 경력 단절을 아쉬워하며 집에 있는 엄마들도 많이 봤거든요.
저는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젊은 엄마를 보면 “지금 돌아오는 돈이 0원이라도 가능한 한 일을 계속하라”라고 합니다. 아이가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는 언젠가 지나가거든요. 그것 때문에 일부러 꿈을 포기하는 건 안 된다고 해요. (…) 경력이 단절되더라도 싹을 갖고 있어야 해요. 취미라도 계속해야 해요. 적금을 붓듯이요.
- 정신과의사 한성희, 중앙일보 인터뷰 중
저도 외롭다 투정 부리지 않고 감사히 재택근무러의 하루를 마무리해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