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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Feb 07. 2023

서울권 4년제 문창과 생존기(2)

1. 인문고등학교를 자퇴한 이유

대체로,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고 검정고시 치렀다는 말을 거리끼지 않는 편이다. 친구들은 이미 다 알고 있고 사교모임에서 본 사람과 오래 대화하게 되어도 '전 자퇴했었어요'라고 편히 이야기한다. 무게 잡고 "저... 자퇴했어요."가 아니다. 커피가 다 떨어져서 주문 다시 하고 오겠다는 듯 말하고 다니니 상대방 입장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그런 태연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왔는지도 모르겠고.

    자퇴의 발단도 그리 진지한 게 아녔다. "너 자퇴할래?" "음... 그럴까?"

    진짜 이게 끝이다. 더 섬세한 이야기를 하려면, 그에 걸맞은 전사가 필요하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갑작스러운 이사로 전라도에서 경기도까지 가게 되었다. 부친의 회사가 경기도에 있고 나도 태생은 그곳이니 깜짝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중간고사 기간에, '우리 열흘 뒤에 이사한다'라고 통보받은 심정은 아득하긴 했다. 다만 당시 다니던 여자고등학교에서는 복장 점검이 심한 데다가 수행평가로 자수 파우치 만들기(!)를 시켰으니, 손재주 막막한 난 거기에서 도망치게 된 것만은 가뿐했다.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면서도.

    나는 그때 이미 내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나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도 없었고. 예민함은 그런 공허와 혼란에서 기인했다.

    하여간 그렇게, 6개월 다닌 여고를 떠나 경기도 공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 낯선 남자 어른들, 개 두 마리

부친도 몰랐을 정도로 갑자기, 그리고 독단적으로 모친이 결정한 사안이었다. 이사 갈 집도 구하지 못해서 8년간 거주한 아파트를 떠나 부친이 숙식하는 공장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부친은 가족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사방에 공장과 시멘트 바른 노지뿐인 곳이었다. 작은 사무실 한 칸이 딸린, 거대하고 시끄러운 기계가 돌아가는 곳. 공장 안에서는 늘 석유 냄새가 났고 대화할 수 없을 만큼 시끄러운 데다가 늘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있었다. 소통이 불가한 곳이었다. 부친이 평소에도 우렁우렁하게 말하는 게 이곳에서 생긴 난청 때문은 아닌가 싶게.

    모든 곳이 검은 기름 투성이였고, 바닥은 녹색 방수페인트로 칠했고, 모든 기계에 기름때가 끼어 있었다. 발 들여놓기 좋은 곳은 아니다. 남녀공용 외부화장실에서 샤워를 해결해야 했다. 온수가 나와 다행이었지만, 세면대에도 늘 때가 끼어 있었고, 비누는 검은 기름으로 말라붙었고, 남자 소변기 옆에는 항상 남아도는 금속 거푸집(공장에서 제조하는)이 널려 있었다.

    거주 공간은 두 군데였다. 싱크대가 있는 부엌 컨테이너 한 칸,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자는 침실용 컨테이너 한 칸. 바닥에 이불 깔아 놓은 건 동일했고 여부가 불분명한 낡은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도 같았다. 우리 가족 셋+개 두 마리는 침실을 차지했다. 식사 때마다 부엌 컨테이너에서 공장 직원-고용된 낯선 중년 남성 한 명, 삼촌과 둘러앉았다. 보통 모친이 식사를 차렸고 고모가 자주 와서 도왔고, 고모부도 그 식탁에 끼어 앉는 일이 잦았다.

    이 인원이, 붉게 옻칠한 낡은 식탁에 주저앉아 밥을 먹고 각자 일어섰다. 난 공용화장실에서 샤워한 뒤, 거기서 아침을 먹고, 부친의 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내게는 노트북이니 아이패드 이런 물건이 없었다. 그곳은, 지금 생각해 보면 단절된 공간이었다. 마트나 편의점 같은 일상적인 편의시설에 가려고 해도 십 분간 차를 타야 했으니까. 예민하고 독립적인 성격이었던 나에게는 너무 많은 사람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단, 좁았다. 컨테이너 한 채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으니 5평 원룸에서 세 명(과 개 두 마리)이 살았다고 보면 된다. 화장실이 바깥에 있는 원룸.

    옷을 갈아입을 때를 빼고는 문을 잠글 수도 없어, 내 방이랄 것이 존재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지만 별다른 불편감을 느끼진 못했다. 각종 '어른의 사정'으로 얽힌, 꺼려지는 어른들이 드나들든 낯선 사람이 들러 뭐라 하든, 심지어 아침에 더러운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을 때에도 별 생각 안 들었다. 적응하지 않으면 나만 힘들었을 테니 다행인 일이다.

    그곳에서는 공장 사무실에 있는 공장작업용 구식 컴퓨터를 빌려 글을 썼다. 사람이 쓰지 않을 때 얼른 마무리해야 했고 중간중간 삼촌이나 부친이 다가와 작업을 하곤 했지만 그것도 쓸 만하다고 느꼈다. 바깥도 엄청 시끄러운 데다가 사무실로 들어온 사람이 내 모니터를 전부 볼 수 있는(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는데. 마우스나 본체도 때와 먼지로 지저분했지만, 내가 신경질을 낸 건 "대체 컴퓨터 조각모음을 언제 마지막으로 한 거냐" 뿐이었다. 조각모음 프로그램을 실행시키자 빨간 선 투성이였으므로...

    왜 그렇게 무던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좋은 감정 없는) 가족들이 늦은 밤에 들어와 뭔갈 챙겨줄 때면 신경질 부리거나, 잔소리하는 모친에게 괜히 짜증부리기는 했지만 환경 자체에는 의심이 없었다. 새벽에 자동차가 도로를 지나가며 컨테이너가 흔들리고, 쥐가 천장을 갉는 소리를 들어도 오히려 즐거웠다. 먹고 자는 것보다 큰 스트레스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개들은... 지금 그런 데에 개와 함께 살라고 하면, 나는 둘째치고 너무 좁아서 개를 못 키운다고 성 낼 거다. 나의 늙은 개들. 난 하교 후에 부친을 기다렸고, 함께 학교 앞 서점에서 아무 소설이나 골라 샀다. 내 부모는 책에 쓰는 돈을 무한하게 허락해 주는 부류였다. 거의 매일 한 권씩. 그리고 자기 전까지 그걸 읽었다.

    이런 생활은 한 달여간 계속됐다. 불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는데, 가끔 하교 후 돌아왔을 때 그 시멘트 노지에, 농장에서 탈출한 닭이나 생뚱맞은 고양이가 덩그러니 걸어 다니고 있으면 즐거웠다. 그것들은 하루아침에 이슬처럼 사라지곤 했지만.

    컨테이너에 살기 전후로 삶이 나뉜 것처럼, 이 이전의 기억은 유리조각처럼 선명한 이미지 몇 개만 남아 있다. 잘 떠오르지 않는다. 실은 한 달인지 두 달인지 이 주인지, 컨테이너 생활의 기억도 투미하며, 이 모든 게 내 착각일 수도 있다.



2. 너 자퇴할래?

글이 뭐 이렇게 우울해졌지? 우울증을 앓고 있기는 했지만 삶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재밌었다. (인생의 재미와 우울, 무기력, 고독은 모두 별개라는 걸 알아야 한다.) 당시에 읽은 소설들이 대학 입학 후 레퍼런스로 작용해 주었고, 또 이렇게 이야기할 거리도 만들어 주지 않는가. 자랑스럽게 할 얘기는 못 되지만 말이다.

    이후 구한 집은 아파트였고, 신도시였고, 근처가 좀 황량하긴 했지만 나쁜 정도는 아녔다. 상가 건물과 병원과 카페가 있으면 충분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사하기 전에는 시골에 살았으므로 이 모든 걸 누리기 위해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야 했으니. 물론 이 아파트에서도 학교에 가려면 읍내까지 차를 타야 하긴 했다.

    본래 사립 미션스쿨에 다니던 터라 학교 분위기가 자유로운 것에 적응하기까지 좀 걸렸다. 수업 시간만 되면 모든 학생이 차려입고 앉아 숙연해지던 여고와 달리 수업 종이 쳐도 돌아다니는 아이가 많았고, 담임 선생님은 젊었고, 등교 시간이 아홉 시였다. (이전 학교는 일곱 시 오십 분이었다.) 운동장이 있었고 매점이 북적거리는 보통의 고등학교... 그런데 내가 입학한 때가 하필 시험 열흘인가 전이었다.

    게다가 동아리 모집도 끝난 뒤였다. 동아리 자율활동이 활발한 곳이어서 전단지를 보고 골라야 했는데, 나는 그냥 제일 눈에 띈 토론동아리에 지원했다. 알고 보니 교내에서 유명한 곳이었고 심사위원(동아리 선배들) 이 있는 면접을 봐야 했다... 학생들이 줄 서서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은 생소했다. 사립학교에서는 동아리란 명분뿐이었으니까. 나는 제비 뽑기로 주관을 피력할 주제를 골랐다. "백설공주에게 키스한 왕자는 성추행범인가?"였다.

    실은 그전에 "황색 언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주제를 받았는데, 황색 언론이 뭔지 모르겠고, 검색해 보기에는 스마트폰을 거두어 간 뒤라서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대답했더니 친절한 선배들이 바꾸어 준 거였다. 나는 토론은커녕 발표조차 힘들어하는, 그냥 전단이 붙어 있어서 하라는 대로 한 전학생이었고 '네 의견'이라는 걸 존중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생각해 보았다. 백설공주의 왕자는 성추행범인가?

    놀랍게도 줄줄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여기에 적기에는 지나치게 수선스럽고 애처로운 의견이라 굳이 쓰지 않겠다. 나는 고1이었으니까...)

    그대로 말했고, 왠지 동아리 사람들이 면접 뒤부터 나를 다 알아보게 되었고, 합격했고, 나는 역시 누구의 이름도 모르는 전학생 신분으로 '말 잘하는 애'가 되어 있었다. 이런 칭찬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내 부모에게 나는 친구가 없고, 있어봐야 조용한 애들끼리나 놀고, 책만 읽고 컴퓨터 게임이나 하는 내성적인 딸이었기 때문에... 나 또한 초중등학교를 분교로 나온 터라 누군가 나를 알아보며 친근하게 구는 데에는 면역이 없었다. 자리를 깔아주니 신이 났었나 보다. 전교 토론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다.

    문제는 그 토론대회가 전교에 방송되었다는 거다. 나는 쟤를 모르는데 쟤가 나를 아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나는 좀 거만해졌다. 학교생활을 떠올리면, 쓸데없이 고집스럽고 불성실하고 오만했던 나와 그걸 잘 받아준 친구들~ 같은 것만 생각나 부끄러워진다. 자퇴한 게 다행이려나. 아니, 진짜 다행이다.


   자퇴. 그건 가족끼리 외식하고 돌아오던 저녁, 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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