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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심리사 윤제학 Nov 22. 2023

장담컨대, 분명히 당신은 죽을 것이다.

인간의 유한함에 관하여

내가 장담하건대, 당신은 분명 100년 안에 죽는다.


사실 100년 한 짝이 아닐 수도 있다. 50년? 아니 어쩌면 불의의 사고로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 인생의 유한함과 내일의 불확실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사실 우리 중 누구든지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그것은 쉽게 입 밖으로 꺼내거나, 유쾌하게 말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더욱이 죽음의 불안이 더욱 큰 사람(병을 가졌거나, 나이가 많이 든, 혹은 위험 상황에 쉽게 노출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 같은)에게는 터부시되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고 당신도 죽고 나도 죽을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말들, 대화들, 글과 웃음, 분노, 짜증, 슬픔, 행복했던 순간들, 지우고 싶도록 상처됐던 순간들 따위는 더 이상 무의미하고 '언제 한번 있었던 적'이 있는 그러한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허무함과 동시에 '인생의 덧없음'을 알려준다.




“얼마 전 어느 여름날, 나는 과묵한 한 친구와 아직 젊지만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던 한 시인과 함께,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기는 듯한 시골길을 산책한 적이 있다. 그 시인은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해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서 환희의 기분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엔 소멸되고 말 거라는 생각, (중략) 겨울이 오면 그 자연의 아름다움도 사라지고 없을 거라는 생각에 착잡한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는 그가 사랑하고 찬미했던 모든 것들이 덧없음의 운명 때문에 제 가치를 손상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짧은 글 ‘덧없음’(1915)의 첫머리다. 모든 것들이 ‘덧없음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 때문에 슬퍼하던 시인을 회고하며 글은 시작된다.

인생이 덧없다는 말에서 '덧없다'의 뜻은 무언가가 일시적이고, 허무하며, 지속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인생, 더 나아가 모든 것이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여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




인생이 덧없다는 것을 입 밖으로 말함으로써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사실 늘 '나와 세상'이 적용받고 있던 규칙인 

'모든 것은 지속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지속적인 것이 없다.

노화에 따라서 인간의 아름다움도 순간에 존재할 뿐이며, 일확천금과 몰락은 예고도 없이 돈의 지속성을 퇴색시킨다.

하물며 희로애락과 같은 우리의 행복과 불행, 순간순간의 기분과 느낌 같은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더 심오하게 생각하자면, 인간 자체도 지속적인 것은 아니다. 물리적으로는 순간순간 세포가 분열하며 태어나고 죽으며, 매 순간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고 변하고 있다. 자라나는 머리카락과 손톱, 피부의 노화, 그로써 생겨나는 외모의 변화는 우리가 한결같지 않은 변화하고 있는 동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심리적인 부분도 그렇다. 나의 성격과 생각, 기억, 기분, 감정은 때때로 변하고 있고 그것들로 인해 생겨나는 나의 자아와 의식, 정체성들은 필연적으로 지금도 변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 개개인은 모두가 덧없는, 그러니까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내가 누구인지 정의할 수 없음을 시사함에 따라 나 스스로에 대한 혼란감을 주는 동시에

이 한 인간의 생을 지나고 있는 '나의 현재' 그리고 '현재의 나'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현재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나의 이 순간' 또한 현재에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모든 것은 소멸한다. 그 어떤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도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슬퍼만 하는 것이 옳은가?

오히려 그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인즉슨,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운명이 어떻든 간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순간에 대해 방해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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