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표없이 예쁜 디자인은 없다
제품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예쁘게' 디자인해달라는 말이다. 이것은 외부에 디자인을 맡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디자이너에게 돈을 지불하는 클라이언트는 분명 그러한 전문성을 원하기 때문에 돈을 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디자인할 때 '예쁘게' 디자인하려 하지 않는다. 종종 디자인 결과물 중 하나가 내 눈에 '예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들은 종종 그 안을 선택하지 않는다. 즉, '예쁘다'라는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게 예쁜 디자인이 클라이언트에게는 미워보일 수 있고, 클라이언트에게 예쁜 디자인이 소비자에게는 미울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예쁜' 디자인을 쫓게 되면 결국 좋은 디자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또, 만들어진 결과물이 현실적으로 시장에서 외면받거나 아예 제작하고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발생해 많은 비용을 안고 생산되어야 하거나 이마저도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디자이너가 미적인 가치만을 쫓아선 안 된다는 것인데, 디자이너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공학자들이 하듯 공학적 가치를 쫓아야 하는가? 경영인들이 하듯 무조건 잘 팔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가?
물론 위에 예시로 든 두 분야의 전문인들을 포함해서, 디자이너 역시 한 가지 가치만을 추구해선 안 된다. 공학자들도, 경영인들도 그리고 디자이너도 공학적 기능과 시장성은 모두 고려하여 결과물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 둘이 각각의 전문성을 기능성과 시장성에 두고 있다고 한다면, 디자이너가 추구해야 할 하나의 중심적 가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디자이너의 중심적 역할은 회의 테이블에서 '효율'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효율은 어떤 분야에서도 중요하지만, 다른 분야에서 효율이 '목적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추구하는 바'라고 한다면, 디자인에서는 목표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즉, 타 분야와의 회의에서 기능성과 시장성이 이야기되는 가운데 목적 지향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추구해야 할 어떤 목표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감성, 소재, UX, 공정 등을 이야기하며 전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잡는 것이 디자이너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다.
다시 말하자면, 디자이너의 역할은 '단순히 아름다운 어떤 것을 쫓아가는 과정'을 넘어, '특정 목표 시장과 목표 가치에 보다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우선순위와 가이드를 제시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미적인 요소는 이 효율성의 한 부분으로 간주된다. 즉, 목표에 가까워지기 위한 다른 조건들이 충족된 상태에서 목표 시장이 좋아할 만한 미적 요소가 갖춰진다면 그 효율성이 극대화된다는 점에서, 미적인 외형을 가지게 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주용한 역할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보급형 제품의 목적이 아주 저렴하게 만들어져 널리 사용되는 것이라면, 이 제품을 디자인할 디자이너가 고려해야 할 효율성은 생산과 유통에 있어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 1순위이고 동시에 저가 시장에 어필하기에 좋은 마케팅 요소들이 2순위로 고려되어야 하며, 그들이 미적이라고 여길 만한 어떤 형태나 재질 등이 3순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디자이너는 먼저 1순위로 생산방식과 그에 따른 재질, 대략적인 구조를 고민하고 이를 중심으로 마케팅 포인트를 잡아가면서 합리적인 가격이지만 보급형 시장에 충분히 어필할만한 감성을 추구하는 미적인 어떤 형태를 갖춰 나가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서 미적인 요소는 현실적으로 후순위로 고려되어야한다. 절대 다수의 프로젝트는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을 안고 있으며. 디자이너의 작업은 본질적으로 결국 대중에게 소비되는데 목표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디자이너 개인의 미학적 철학이나 가치를 지나치게 고집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예술적 영역의 디자인이 아닌 다음에야 대체로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요소가 우선순위로 고려되어야 한다. (여기서 종종 디자인 실패가 발생한다. 예술가적 기질이 강한 디자이너들은 이 부분에서 개인이 가진 철학과 가치를 저버리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 우선순위들은 선형의(linear) 과정은 아니다. 단지 우선순위가 위와 같이 정해진다는 것이며, 실제로는 1,2,3 순위가 뒤섞여 동시적으로 고민되면서 최적화된 결과물이 제작된다. 그리고 대다수의 경우 보통 미적인 요소 외의 다른 요소들은 경험이 많은 디자이너일수록 노련하게 대응하기 쉬우나, 미적인 요소에서는 조형적 경험에 덧붙여, 결국은 '센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재능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결정적인 부분에서 재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어떤 직업에서든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이 재능은 꼭 선천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글은 디자이너의 역할에서 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에서 서술했듯이 미적인 가치는 소비자에게 어필한다는 디자인의 본질적 목표에 대한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측면에서 항상 중요하게 작용한다. 또, 미적인 부분이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경우라도 다른 요소는 일반적인 사고와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반면 미적인 요소는 조형적 훈련과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문성을 보이기 어렵다는 점에서 결국 디자이너에게 외형에 대한 가치 추구와 연습은 많이 필요하다. (산업계에서 미적인 외형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직군이 디자이너뿐이라는 것은 결국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외형적 산출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다만, 디자인이란 과정은 미적인 성형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결국은 세상에 나와 누군가에게 사용되고 애호되는 것이 그 목표이기 때문에 여러 요소를 동시적으로 고려해야한다. 사실 절대적인 미의 기준도 모더니즘 시대 이후로 많이 무너지지 않았던가? 현실적으로 제작되고 유통되기 위한 기획과 설계에 덧붙여 나만의, 혹은 제작자 집단에서 만의 아름다움이 아닌 소비자와 사용자가 사랑할만한 아름다움과 경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