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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진 Sep 28. 2016

"제가 '디자인 툴'을 좀 배웠는데요."

#8. 디자인은 표현 기술이 아닌 구현 기획이다

"이 부분에 블렌딩 옵션에서 그림자도 넣고 테두리도 두르면 어떨까요?"

"아... 그렇게 하면 원래 목표했던 심플한 이미지에서 벗어날 것 같습니다."

"음... 혹시 원본 파일 저한테 보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디자이너 사이에서 들리는 우스개소리로 가장 무서운 클라이언트는 '포토샵 다뤄본' 클라이언트라고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표현 효과들을 이 곳 저 곳에 넣고 싶어하는 아스트랄함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위의 사례는, 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실제로 주변에서 발생했던 대화 내용이다.


그런데 디자이너는 어떤 기술을 가진 사람들인가? 일반적으로 디자이너는 시각화 기술을 가진 전문직으로 표현된다. 2D 그래픽, 또는 3D 그래픽 툴을 활용해 어떤 시각적인 형태를 만드는 전문가들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시각 표현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디자이너로 정의될 수 있을까? 혹은, 시각화 기술이 없으면 디자이너가 될 수 없는 것일까?




디자인은 '표현 기술'이 아니라 '구현 기획'이다.


실제로는, 디자인은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기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대상물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획을 제안하는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의 결과물이 시각적 표현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디자인은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결과물 자체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오늘날의 디자인이 지향하는 것은 더더욱 맥락과 경험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구현 기획 그 자체이다.




호이포이 캡슐, 드래곤볼 (토리야마 아키라)



예를 들어,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호이포이 캡슐은 시각적으로 형태와 용도, 크기, 무게 등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디자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디자인이 '시각적 표현 기술'이라면 만화에서 새로운 시각적 표현을 창조해내는 만화가들은 모두 훌륭한 디자이너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토리야마 아키라를 훌륭한 만화 작가라고 호칭하지만 디자이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호이포이 캡슐은 만화 속 캐릭터의 성격을 강화하고 배경을 설정하는 만화적 사물 장치인 것이다.



다음으로, 아래의 글을 보자.


이번 디자인 프로젝트의 목표는 '비용 효율적인 의자'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의자의 등받이와 하판은 플라스틱으로 사출하되, 규칙적으로 타공하여 내구성을 높이고 재료의 낭비를 줄인다. 의자의 다리와 등받이 고정대로는 동일한 규격의 6개의 봉을 압출한다. 봉의 끝은 고무 패킹으로 마감한다. 6개의 봉은 하판의 빈 공간에 수납될 수 있도록 하여 보관 및 유통 시에 작은 크기로 포장될 수 있도록 하여 유통 비용을 줄인다. 전체적인 형태는 의자에 맞게 곡면을 넣되, 장식적인 요소를 줄여서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깔끔하여 어디에나 어울릴 수 있는 감성을 추구한다.  



위의 글은 아래의 이전 글(https://brunch.co.kr/@yjjang/9)에서 소개했던 엔초 마리(Enzo Mari)의 'Box Chair' 제작 계획의 일부를 글로 옮긴 것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계획이 있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유사한 내용의 말이 오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위의 시각적으로 표현된 '호이포이 캡슐'과 아래의 언어로 표현된 'Box Chair' 제작 계획 중 어떤 것이 더 디자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래의 글이 더 디자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디자인의 본질이 시각화 기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디자인의 많은 과정은 '말'을 통해 이뤄진다. 즉, 다양한 부서와의 소통 과정에서 주제, 목표, 현실적인 조건들, 공정, 가격, 마케팅, 유통, 관리 등을 논의하면서 디자인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시각 이미지는 그 과정에서 더 원활한 소통을 위해 보여지는 소통의 형식인 것이다.



물론, 디자이너에게 표현 능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당연하게도, 위의 논의가 시각 이미징 기술이 디자이너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제작 계획 글을 보면 단순히 시각적으로 표현된 어떤 대상보다는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계획과 목적의식이 드러나있지만 위의 글을 보고 생각하는 결과물의 형태는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다. 시각 이미지는 이 과정에서 구성원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생각의 틀을 제시한다. 즉, 이런 시각적 표현 역시 디자인을 완성하는 부분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어떤 디자인 결과물도 매력적인 요소를 가져야 한다. 디자인은 매력을 높이기 위한 공정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 매력 요소는 잘 정리된 형태로부터 비롯되지만, 매우 가격이 저렴하거나 기능이 혁신적으로 탁월한 경우에는 다른 요소들이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디자이너는 이들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저렴한 가격이 매력으로 작용해야 할 때에는 더 저렴하면서도 최대한 저렴해보이지 않는 선을 정해 디자인에 반영하고, 기능이 매우 중요할 때에는 다른 요소들을 포기하더라도 기능에 초점을 두어 디자인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감성이 필요한 경우에는 감성을 강조하는 방향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디자이너는 제품이 가진 매력을 찾고 이를 부각시키는 공정을 진행하며,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경우는 레이아웃이나 배색, 형태, 질감 등을 매력적으로 기획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밥솥, 무인양품 (나오토 후카사와)



디자인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때, 그 결과물은 목표했던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다. 이를 이끄는 것은 결국 디자이너의 표현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디자이너가 레이아웃과 색채, 감성 등에 대한 학습과 훈련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디자이너 스스로가 '기술자'가 아닌 '상상가'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정리하면, 누군가가 일러스트를 잘 못 그린다거나 3D 렌더링을 잘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디자이너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위의 구현 계획을 목표에 맞게 효율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어떤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디자이너가 아니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반대로, 몇 가지 시각화 도구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전체적인 기획에 맞는 창의적인 대상물을 기획해 낼 수 없다면 디자이너라기보다 '시각화 기술자'에 더 가깝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시각화 기술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디자인의 본질에서 벗어나거니와, 좋은 디자인을 위한 필요충분조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목표와 매력을 찾아서 부각시키는 것, 그 전체적인 기획에 몰입하면서 다양한 결과물을 상상해 나가다 보면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결과물을 꿈꿀 수 있다. 그 상상을 어떻게 그려낼 지 역시도 물론 중요하지만, 상상하지 않으면 어떤 좋은 기술로도 나올 수 있는 결과물에는 한계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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