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의 방어적 활용 - 크로스라이선스
2016년, 화웨이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미국과 중국 법원에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과거 중국 기업들이 카피캣(Copycat)으로 불리며 방어에 급급했던 것과 달리, 화웨이가 선제 공격을 날렸다는 점이 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주요 쟁점은 4G LTE 통신 표준특허(SEP) 및 UI 관련 상용특허 10여 건이었다. 화웨이는 삼성이 특허료를 안 내고 무단 사용했다고 주장했고, 삼성은 화웨이가 FRAND 원칙을 어기고 너무 과도한 로열티를 요구하며 협상에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고 맞섰다.
표준특허(SEP)와 FRAND 원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데이터를 쓰기 위해서는 LTE나 5G 같은 통신 표준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 표준은 “이렇게 연결하라, 이런 신호를 주고받아라”라는 공식 규칙에 가깝다. 문제는 이 표준 안에 특허 기술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어떤 회사의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되면, 그 기술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기술이 된다. 이렇게 표준을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특허를 표준필수특허, 즉 SEP(Standard Essential Patent)라고 부른다. 일반 특허는 안 쓰면 그만이지만, SEP는 안 쓰면 제품을 만들 수 없는 특허다. 그래서 SEP를 가진 기업은 시장 전체를 막을 수 있는 아주 강한 위치에 서게 된다.
화웨이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내세운 '네트워크 핸드오버' 관련 핵심 특허(US 8,483,166)를 살펴보자.
스마트폰이 4G(LTE)망을 쓰다가 산간 지역이나 건물 지하로 들어가면 3G나 2G망으로 접속을 바꿔야 한다. 이때 4G에서 발급받은 '임시 ID(통행증)'를 구형 망 기지국에 보여줘야 하는데, 구형 망은 시스템이 달라서 이 ID가 어디서 왔는지(어느 관리 서버 소속인지)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화웨이의 이 특허는 4G용 임시 ID를 보낼 때, 그 뒤에 이 ID를 발급해 준 서버(MME)는 어디에 있다라는 정보를 살짝 덧붙여서 보내는 기술이다. 이 기술 덕분에 사용자는 4G에서 3G/2G로 망이 바뀌어도 전화가 끊기거나 인터넷이 먹통이 되는 현상 없이 부드러운 통신(Seamless Handover)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 A method for accessing a 2G/3G network comprising:
obtaining, by a User Equipment (UE), a temporary identity (ID) allocated by a Mobility Management Entity (MME) in an evolved network, wherein the temporary ID comprises MME information for identifying the MME;
adding, by the UE, the MME information from the temporary ID to a first P-Temporary Mobile Station Identity (P-TMSI) in an access message;
sending, by the UE, the access message to a Radio Access Network (RAN) node in the 2G/3G network.
4G 서버 정보(MME ID)를 2G/3G용 임시 식별자(P-TMSI) 내에 삽입 전송하여, 서로 다른 망 사이에서도 끊김 없는 접속(Handover)을 보장하는 기술
이처럼 화웨이의 당해 특허는 현대 스마트폰이 다양한 통신망을 오가며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표준 중의 표준' 기술이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이 특정 기업의 특허로 보호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SEP를 가진 회사가 특허 사용을 제한하거나 말도 안 되는 로열티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특허는 기술 보호 수단이 아니라 시장을 봉쇄하는 무기가 된다. 이 위험을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FRAND 원칙이다.
FRAND는 공정하게(Fair), 합리적으로(Reasonable), 차별 없이(Non-Discriminatory) 라이선스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이다. 표준화 기구는 “당신의 기술을 표준에 넣어주겠다. 대신, 그 특허는 누구든지 쓸 수 있도록 공정한 조건으로 라이선스하라”는 조건을 건다. 즉, SEP를 가진 기업은 강한 권리를 얻는 대신, 그 권리를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겠다고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다. 이 FRAND 선언은 단순한 도덕적 약속이 아니라, 실제 소송에서 법원이 판단 기준으로 삼는 법적 의무에 가깝다.
삼성과 화웨이 간 분쟁에서 FRAND 원칙 위반 여부가 쟁점이 되었는데, FRAND를 위반한 상태에서는 강한 권리 행사(금지청구)가 어렵기 때문이다.
1심에서 중국 법원은 화웨이의 손을 들어주며 삼성 제품의 생산·판매 금지령과 함께 약 130억 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반면 미국 법원은 삼성이 요청한 '소송중지명령(Anti-suit Injunction)'을 받아들여, 중국 법원의 판매 금지 조치가 집행되지 않도록 막아주며 삼성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최종적으로, 약 3년간의 치열한 공방 끝에 2019년 양사는 '크로스 라이선스(Cross-License)' 계약을 체결하며 모든 소송을 취하하기로 합의했다.
크로스 라이선스란 무엇인가?
A 회사와 B 회사가 각각 특허를 보유하고 있을 때, 서로가 가진 특허를 상호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계약을 크로스라이선스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쪽이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하면, 상대방 역시 자사가 보유한 특허를 근거로 맞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분쟁은 장기화되고, 시간·비용·사업 리스크가 모두 커지게 된다.
이 때문에 실무에서는 소송으로 소모적인 분쟁을 이어가기보다, 서로의 특허를 사용하기로 합의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선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양사가 보유한 특허의 수량과 기술적 가치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특허 가치가 더 낮은 쪽이 차액에 해당하는 로열티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게 된다.
크로스라이선스가 체결되는 전형적인 예로, 상대방이 원천 특허를 보유하고 있고 내가 그 기술을 발전시킨 개량 발명에 대한 특허를 보유한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내가 개량 특허의 특허권자라고 하더라도, 해당 개량 발명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원천 특허권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이처럼 하나의 발명을 실시하기 위해 서로의 특허를 함께 사용해야 하는 관계를 ‘이용관계’라고 한다. 이러한 이용관계에서는 크로스라이선스가 매우 효과적인 해결책이 된다. 즉, A는 B에게 원천 특허의 사용을 허락하고, B는 A에게 개량 특허의 사용을 허락함으로써, 서로가 각자의 기술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구조에서 바라보면, 삼성과 화웨이 간 분쟁 역시 단순한 특허 침해 다툼이 아니라, ‘특허의 질(Quality)’과 ‘포트폴리오의 양(Quantity)’이 충돌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화웨이는 자사가 보유한 표준특허의 규모와 중요성을 앞세워 삼성에 뒤지지 않는 협상력을 갖고 있음을 강조했고, 삼성은 맞소송을 통해 화웨이 역시 삼성의 특허(반도체, 디스플레이, 통신 표준 등) 없이는 제품을 생산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렵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결국 이 분쟁은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이겨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기술 그물망에 걸려 있어 "각자 갈 길 가려면 서로의 특허를 인정해 주는 것이 가장 싸게 먹힌다"는 고도의 비즈니스적·법률적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시사점]
특허는 단순히 투자 유치나 IPO 과정에서 기업의 기술력을 설명하는 자료에 그치지 않는다.
적절히 설계된 특허 포트폴리오는 경쟁사의 모방을 억제하고, 시장 진입 장벽을 구축하는 핵심 수단으로 기능한다. 특히 기술 경쟁이 치열한 산업에서는 단일 특허만으로는 방어력이 제한적이며, 분쟁이 발생할 경우 상대방의 소송에 크로스라이선스로 대응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의 핵심·주변 특허로 구성된 입체적인 특허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면, 소송 리스크를 낮추는 동시에 협상력 있는 크로스라이선스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결국 특허 전략의 핵심은 ‘출원 여부’가 아니라, 시장 진입 장벽을 형성하고 분쟁 국면에서 방어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포트폴리오 단위로 설계하는 것에 있다.
아울러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특허의 ‘양’만큼이나 개별 특허의 ‘유효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삼성과 화웨이 간 분쟁에서 삼성 측이 취한 가장 강력한 방어 수단 역시 단순한 맞소송이 아니라, 화웨이 특허에 대한 무효 소송이었다. 이 과정에서 화웨이가 주장한 특허들이 과연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기술인지(신규성), 또는 기존 기술을 바탕으로 쉽게 도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지(진보성)가 핵심 쟁점으로 다루어졌다.
그 결과 실제 소송 과정에서 화웨이의 일부 특허는 무효로 판단되거나 권리 범위가 축소되었고, 이에 따라 화웨이가 행사할 수 있는 특허 기반의 공격력 역시 상당 부분 약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이 분쟁은, 개별 특허의 유효성과 특허 포트폴리오 전체의 구조가 기업의 협상력과 방어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임을 분명히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