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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14. 2024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D-535

225

한쪽 면에 225라는 커다란 숫자가 써진 상자가 도착했다. 225번 훈련병이 보낸 눈물 상자였다. 뭐가 들어있는지 뻔히 아는데도 설레고 뜯기도 전에 시야가 흐려졌다.


커다란 상자 안에는 네가 메고 갔던 가방이 단정하게 놓여있더라. 차분히 개어 놓은 옷과 비닐 안에 한 번 더 넣어놓은 운동화.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내용물이었지. 가방 밑에는 투박하게 '편지'라고 쓰여있는 도화지가 있었다. 삼단으로 접힌 도화지가 잘 품고 있는 것은 네 편지였다. 깨알 같지만 또박또박 쓴 편지.


10년 만에 써본다는 편지에는 군대에서 느낀 너의 솔직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더라.

"옛날 생각, 가족 생각. 미안한 거, 고마운 거, 울었던 거, 웃었던 거 생각이 많이 나."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많다 보니 편지를 쓸 때 우는 사람은 혼자뿐인 것 같다던 너. 자신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흐르지만 솔직해지기로 했다는 너. 말 없던 자신을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너.

겨우 일주일인데, 군대는 네가 너를 온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이 됐나 보구나.


"엄마가 써준 책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어."

엄마의 비공식 첫 책과 두 번째 책은, 두 아들의 성년식 선물로 엄마가 대신 써준 너희들의 자서전이란다. 정식 출간을 한 건 아니지만 엄마 마음속에는 그 두 권이 1번, 2번이다. 3월 말 네 생일에 전해준 자서전이 책상 위에 그대로 있길래 안 읽는 줄 알았더니, 읽고 있었구나? 그걸 읽으면서 많이 울었구나?

고맙다. 엄마의 관점에서 함부로 써놓은 네 이야기인데, 읽어주고, 울어주고, 그걸 말해줘서...


남은 18개월과 앞으로의 네 모든 인생을, 엄마는 더 이상 써주지 못한단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너 자신이고 그 하루를 빛나게 장식하는 것도 네 몫이지. 매일의 페이지가 쌓여 너라는 사람의 인생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 외에,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네가 울면 휴지를 건네줄 수는 있겠지만 너를 울게 한 세상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너 대신 뛰쳐나갈 수는 없어. 네가 웃으면 함께 얼싸안고 기뻐해 줄 수는 있지만, 네가 웃는 게 내 덕이라고 숟가락을 얹어서도 안 돼. 그게 부모가 지켜야 할 선이 아닐까. 네가 스스로 네 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선.


오늘도 가족 생각을 하면서 울고 있을지 모를 아들아.

울고 있는 자신의 마음조차 인정하고 끌어안겠다는 너의 다짐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네 청춘의 한 페이지를 오늘도 잘 써내려 가기를... 오랜 시간이 지나 그 페이지를 넘길 때는 환하게 웃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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