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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기억

by 늘봄유정

⭕ 라라크루 화요일엔 샛길독서 : 긴긴밤 1

가끔씩 노든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풍경들이 있었다. 저 멀리서 몰려오는 시커먼 먹구름이라든가. 그 속에서 번쩍이는 번개,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주변의 풀들이 반짝이는 광경, 하늘에서 떨어지는 첫 빗방울이 남긴 자국, 그리고 키가 큰 풀들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에 노든은 압도되었고, 시간을 충분히 들여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 (긴긴밤 19쪽)


� 요즘 여러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은 무엇인가요?


거실 욕실 옆 바구니에 쌓인 빨래를 들고 지나가다가 한 번.

잘 개어 접은 수건을 들고 욕실로 향하다가 한 번.

약속시간에 늦을까 서둘러 집을 나서다 한 번.

일정을 마치고 여유롭게 집에 들어서다 한 번.

아침 커피를 내리다가 한 번.

에어컨을 켜고 냉기가 조금 들어가라고 문을 열다 한 번.

잠자러 들어가면서 거실 전등을 끄다가 한 번.


그렇게 하루에도 십 수 번, 습관처럼 쳐다보게 되는 곳이 있습니다. '긴긴밤'에서 노든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던 멋진 자연의 풍경과는 다르지만, 시간을 들여 보고 또 보게 되는 장면. 군대 간 아들의 방입니다.


주인 없는 방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이란 물질의 변화로 인식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아들 방의 시간은 멈추었습니다. 아들의 휴가가 끝난 후 빨아서 다시 씌워놓았던 침대커버와 베개 커버는 지저분해지거나 흐트러지지도 않고 그대로입니다. 24시간 켜져 있던 컴퓨터 모니터는 꺼져있고 그 옆에 쌓여가던 간식 포장 껍질도 없습니다. 치우고 닦아둔 그대로입니다.


진공상태 같은 방을 가던 길 멈추고 봅니다. 곧 주인을 찾게 될 방, 다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줄 방을 기다립니다. <기억한다는 착각>의 저자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 시선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기억이다."라고 했습니다. 저의 시선이 아들의 빈방으로 향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자고, 놀고, 먹고, 공부하던 아들의 모습을 기억해내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든을 압도했던 풍경에도 어떤 기억이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던 할머니 코끼리, 훌륭한 코뿔소가 될 수 있을 거라며 행운을 빌어주던 코끼리들과 함께 바라보던 풍경이 아닐까요. 그 시절 그 코끼리들이 그리워서, 가던 길 멈추고 보고 또 보게 되는 게 아닐까.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긴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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