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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다운 시작!

< D - 10 >

by 늘봄유정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구나. 추적추적 비 오는 소리, 엄마 아빠가 출근 준비를 하며 바삐 오가는 소리가 행여 네 단잠을 방해할까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내내 비어 있던 방이 오랜만에 주인을 맞아 꽉 찼다. 네 숨으로.


13일의 마지막 휴가를 나온 네게, 전역하면 준비해 주려 하던 새 이불을 내어주었다. 호텔 이불 같은 촉감의 이불. 쉽게 더러워질 것을 염려하면서도 흰색의 이불을 장만했다. 드디어 포근하고 안락한 집에 왔다는 걸 가장 잘 느낄 수 있게 해줄 것 같아서였단다. 성질 급한 어미는 그 마지막 한 달을 못 참고 이불을 꺼냈구나.


너의 제대가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것은 이불뿐이 아니다. 군인이라고 하기엔 다소 긴 머리, 한결 여유 있는 표정, 마지막 휴가를 함께 나온 동기들과의 여행, 부모의 동행 없이 혼자 상담·예약을 하고 온 시력 교정술. 서늘해진 새벽 공기만큼 네 우주의 공기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무료해하던 너는 방 정리를 시작했지. 어제는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서랍을 정리하더구나. 그 작은 서랍에 뭐가 그리 많이 들어있던지, 앙증맞은 스티커부터 딱풀 같은 자잘한 문구류까지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것들을 한 묶음 쌓아놓았지. 오늘은 옷장 정리를 하기로 했는데, 묵혀두었던 옷가지들이 얼마나 쏟아져 나올지 궁금하구나.


어쩌면 너는, 군 전역을 기점으로 네게 익숙했던 과거, 아직은 어렸던 시절과 결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를 "애기야~"라고 불렀던 엄마아빠의 호칭도 바꿔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얼마 전 전역 1,000일을 맞았고 예비군 훈련까지 다녀온 형에게도 가끔은 "애기야~ 밥 먹어라~"라는 소리가 나오지만, 적어도 네 마음은 입대 이전의 그것과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네 외할머니는 명절이 끝나자마자 마음이 더 분주해지셨다. 네 전역을 십여 일 앞두었으니 그러실 만도 했다. PX를 이용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아쉬움에 걸어서 15분 거리인 그곳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신다는구나. 사실, 딱히 필요하고 살 게 있어서라기보다는 할머니의 놀이터 중 하나였던 곳이지. 집 근처 대형마트 세 곳을 매일 다니시며 가격을 외우고 비교를 하면서 장을 보는 것이 치매 예방을 위한 놀이라는 할머니시잖니. 거기에 PX 하나가 더해져 즐거움을 배가시켰던 것인데. 당분간 조금 허전하시겠구나.


엄마의 허전함은 이제 채워졌다. 텅 빈 집에 혼자 있다가 짐을 챙겨 카페에 가곤 했던 지난 몇 달의 공허가 단 며칠 만에 사라졌다. 바빠진 스케줄 탓이기도 하지만 귀가했을 때 누군가 있다는 것이 주는 안정감이 얼마 만인지. 늦게 귀가하는 아빠, 형과는 달리 집에 있을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품게 하는 너였으니 말이다.


전역을 하면 그 당연함도 바뀔 것을 안다. 함께 전역하는 동기들이 사는 지방 여러 곳과 홀로 떠나는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다시 카페에 갈 짐을 챙겨 메는 엄마가 그려진다. 그런데 그게, 섭섭하지 않다. 늘 부족한 엄마였는데도 잘 자라주었구나,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구나, 더 이상 아기가 아니구나. 이런 생각에 흐뭇하고 감사하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카운트다운에 돌입한다. '3, 2, 1 발사!'를 외치면 로켓이 순조롭게 발사되는 그 순간까지 긴장된 마음으로 숨죽이는 관중들처럼, 엄마도 남은 열흘을 더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보내련다. 호들갑 떨거나 설레발치지 않고, 너라는 위성이 우주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모습을 지켜보마.

네 마지막 휴가가 끝나면 서둘러 꺼냈던 이불을 다시 깨끗이 빨아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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