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소비, 다 이유가 있습니다

by 늘봄유정

1월 말부터 한 달 동안 친구의 부모님 집 정리를 도왔다. 기한은 폐기물처리업체가 짐을 실어 가는 2월 21일이었다. 3년 넘게 요양병원에 계신 친구의 어머님을 대신해 당신의 짐을 정리하는 작업은 단순하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사연 없어 보이는 물건이 없었고, 그래서 함부로 처분하기도 힘들었다.


어머님 댁에는 일반 가정집보다 짐이 훨씬 많았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똑같은 믹서기, 헤어드라이어가 왜 몇 개씩 필요했을까. 정전기 청소포, 물걸레 청소포, 세탁 세제, 밀폐 용기가 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지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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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정리 중 소형 가전들.


물건 버리는 것을 힘들어 하셨던 이유도 있었지만, 친구의 말에 따르면 평소에 홈쇼핑을 즐겨보셨다고 한다. 입원 전에는 치매를 진단 받으셨던 터라 물건을 사놓고 잊는 일도 다반사였을 것이다. 홈쇼핑 상품은 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묶어 팔기 때문에 한 번 구매하면 수십 개의 물건이 쌓인다. 똑같은 물건들이 의외의 장소에서 끊임없이 쏟아져나왔던 이유였다.


한국TV홈쇼핑협회가 2024년에 발간한 '2024년도 TV홈쇼핑 산업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TV홈쇼핑 구매 고객의 60% 이상이 50,60대라고 한다. 쿠팡, 11번가 등 이커머스에서의 구매가 평균 10% 내외를 기록하는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5060세대는 구매 채널을 쉽게 갈아타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많이 구매한다고 한다. 은퇴 이후 여가 시간이 늘고 구매력이 있는 시니어 세대가 새로운 소비계층인 '액티브 시니어'로 부상하면서 홈쇼핑의 주도적인 소비계층이 된 것이다.


친구의 어머니가 바로 그 액티브 시니어였다. 오랜 시간 사립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시다 퇴직한 어머님은 안정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왕성한 사회 활동을 지속했다. 패션, 미용, 생활과 관련된 홈쇼핑 제품들이 지속적으로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당신 역시 나이듦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인지 장애가 생기고 외부 활동이 감소했다. 이때부터 쇼핑의 필요는 결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사용을 위한 쇼핑, 소비가 아니라 무료함을 달래주는 벗이자 외부 세계와 나를 이어주는 소비 활동으로 말이다.


소비의 서사를 생각하다보니,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황당했던 쇼핑의 잔재들이 애처롭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새 물건이든 손때가 묻은 물건이든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그것들의 필요, 수요를 창출해야겠다는 생각에 중고거래 앱에 물건을 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 찾던 물건으로 쓰임새를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중고거래 앱을 통해 200여 개의 물건을 팔았다. 많은 물건을 비대면으로 거래했지만, 직접 만나 물건과 현금을 교환하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대면 거래의 대부분은 노인 분들이었다. 배낭을 메고 만 원짜리 수저 세트를 사러 오신 할아버지는 만나기로 한 장소로부터 한참 떨어진 지역에서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며 오셨다고 했다.


한복지로 만든 복주머니를 산 할머니는 당시 거기에 손주들 세뱃돈을 넣어줄 거라며 흡족해하셨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씀에 집 앞까지 장식용 화병을 가져다 드렸더니, 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인사를 하셨던 할머니도 계셨다.


그들에게 중고 물품 쇼핑은 소비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였다. 배낭을 메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누비는 반나절 짜리 여행이자, 손주들을 생각하며 찬찬히 준비하는 설맞이였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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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물품거래 후 받은 돈봉투. 멋스러운 한자 손글씨로 마음을 전해주셨다.


어느 전철역 3번 출구에서 만나자던 할아버지 한 분은, 자신을 '꽁지머리 백발노인'이라고 소개하셨다. 덕분에 전철역 앞에서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봉투에 물건값 1만 5000원을 넣어 건네주셨는데 봉투 겉면에 한자가 가득 쓰여 있었다.


손 글씨와 한자가 귀해진 시대에 정성 깃든 봉투를 받았을 때의 뭉클함을 잊지 못한다. '목요일 오후 세 시, 오리역 3번 출구'까지 한자로 쓰신 게 너무 귀여워, 돈을 빼고도 봉투를 차마 버리지 못했다. 노년이 귀여우면서도 멋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신 분이었다.


소비 이상의 재미와 의미

뇌출혈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작은아버지에게도 쇼핑은 유일한 취미활동이자 외출의 목적이다. 힘들고 귀찮아도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지팡이를 짚고 길을 나서지만 마땅히 갈 곳은 없었다.


그때 작은아버지 눈에 작은 상점 하나가 들어왔다. 기업들의 미판매 재고 물품을 온라인 최저가보다 30~9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며 자원순환에도 도움이 된다는 곳이었다. 친정어머니는 이따금 현관 문고리에 걸려있는 스카프, 지갑, 내의, 우비 등을 발견하면 작은아버지 소행이라며 걱정을 했다. 맛있는 거나 사드시지 괜한데 돈을 쓴다고 말이다.


받는 입장에서는 크게 쓰임새를 느끼지 못하는 물건이지만 사준 이의 마음을 생각해 쉽게 버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대부분이었다. 가족들이 여러 번 말려보았지만, 작은아버지의 쇼핑은 중독 수준이었다. 좋은 물건을 싸게 사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것이 작은아버지에게는 큰 기쁨이어서 도파민 분비를 증가시킨 게 아닐까.


그런 작은아버지의 소비를 흉보는 친정어머니에게도 쇼핑은 삶의 낙이다. 오후 4시에 근처 슈퍼 세 곳을 돌아다니며 가격 비교를 하는 어머니는 싸고 좋은 물건을 발견하면 무조건 3개를 산다. 큰딸과 작은딸에게 하나씩 주기 위해서다.


친정에 갈 때마다 두루마리 휴지, 식초, 간장 같은 물건을 챙겨주면서 당신이 이 물건을 발견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필요 없다고 하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고, 마침 필요해 사려던 참이었다고 하면 또 필요한 건 없냐고 묻고 또 묻는다. 친정어머니에게 쇼핑은, 점점 줄어드는 자녀들과의 교집합을 붙들어두는 끈이었던 것 같다.


노인에게 쇼핑은 소비 그 이상의 것이다. 경제적 풍요와는 상관이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가능한 수준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산다. 너무 많은 물건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대라지만, 노인의 소비에는 소비 이상의 재미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 세상과의 연결을 붙들고 싶어하는 노년의 소비는 소박하지만 열정적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서도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