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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an 18. 2023

'띠'를 어떻게 외우셨나요?

[보글보글 매거진] 글놀이 '띠'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와 각각의 동물을 외우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오', '미', '신'과 '말', '양', '원숭이'를 잘 연결하지 못합니다. 그저 가족들 띠나 외우는 정도지요.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라는 말을 외운 것도 스무 살이 넘어서였습니다. 그것도 초등학생들 덕분에 말입니다.


대학 1, 2학년 시절, 저는 농활(농촌봉사활동)에 미쳐있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농활에 빠지지 않았고 열흘이 넘는 여름 농활 때는 중간에 집으로 돌아와 과외 알바를 하고 다시 내려가기도 했을 정도죠. 새벽 5시에 일어나 담배밭에서 종일 담배순을 따는 게 뭐가 그리 좋았을까요. 농활에 푹 빠졌던 이유는,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들기 전까지, 노을이 이뻤던 저녁부터 칠흑같이 깜깜한 밤까지, 어느 시골의 마을회관에서 일어났던 소소한 이야기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긴, 발톱 깊숙이 소똥이 박히는 데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삽질을 하던 선배, 함께 경운기를 타고 가다가 논두렁에 처박힐 때 혼자만 점프해서 탈출하던 선배, 부녀회장님이 둘이 참 잘 어울린다며 결혼도 생각해 보라던 선배와 썸을 탔던 것도 농활이었죠. (모두 동일 인물입니다.) 결국 졸업한 이듬해, 그 선배와 청첩장을 들고 부녀회장님을 찾아가기도 했으니 대학시절 대부분의 낭만은 농활에서 꽃 피웠네요. 


1996년 여름 농활 때였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마을회관으로 초등학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지요. 대학생 언니, 오빠, 형, 누나들이 공부를 봐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밤늦게까지 놀이만 하다가 돌아갔습니다. 그때 초등학생들이 미친 듯이 불러대던 노래가 있었는데, <꾸러기 수비대>라는 TV 만화영화 주제가였지요. "이제 그만 공부하자~" "늦었으니 집에 가라~"라는 말을 하면 끝도 없이 목청 높여 불렀습니다. 나중에는 우리도 다 외워버려 그 해의 농활 주제가가 되어버렸을 정도.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자축인묘
드라고 요롱이 마초 미미
진사오미
뭉치 키키 강다리 찡찡이
신유술해
우리끼리 꾸러 꾸러기
우리들은 열두 동물
열두 간지 꾸러기 수비대

푸른 바다 위 요정의 낙원
원더랜드
꿈과 희망의 이야기나라
우리들이 갖고 있는 힘을 펼쳐라
마녀 해라 저지하라 물리쳐라
시간공간 넘나들며 
동화나라 지키는
우리들의 동물 친구
열두 꾸러기 수비대

열두 간지 동물들이 악당들을 물리치고 동화나라를 지킨다는 그 만화를 본 적은 없습니다만, 아직도 '띠' 이야기를 하면 넓은 마을회관 거실에서 아이들과 삥 둘러앉아 부르던 이 노래가 떠오릅니다. 정이 담뿍 들어버린 아이들은 우리가 짐을 꾸리는 이른 아침부터 마을회관으로 몰려와 아쉬워했습니다. 다음 계절을 약속하며 헤어지고 몇 번의 계절을 함께 하는 동안 초등학생들은 중학생이 되고, 저 멀리서 쭈뼛거리며 곁눈질로 쳐다만 보다가 돌아갔지요. 

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소 벤치에 앉아 듣던 풀벌레 소리, 논에서 흘러넘치던 개구리울음소리, 새까만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던 별, 별, 별... 여행스케치의 < 별이 진다네 >가 자연음으로 연주되면 우리는 목소리만 더하면 됐던 시절. 


지금은 '초단, 청단, 홍단, 띠박' 등 울긋불긋한 띠에 심취해 살고 있지만,

학기 중에는 가열차게 머리에 '띠'를 두르고 방학 때는 '띠'를 가르쳐주는 만화영화 주제가를 해맑게 부르던 시절을 살았다는 것이 새삼, 행복해집니다.




* 매거진의 이전 글, 장훈 작가님의 글입니다.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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