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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r 09. 2023

마음까지 부러지기 전에

[보글보글 매거진] 글놀이 "거절하는 용기"

유난히 빨래가 많은 우리 집엔 건조대만 네 개다. 베란다 천장에 붙어 이불이나 청바지등 큼지막하고 무거운 빨래를 담당하는 놈 하나, 수건이나 양말을 담당하는 가뿐한 놈 하나, 항상 바쁘게 일하는 놈 둘. 매일 넘쳐나는 빨래를 감당하느라 쉴 틈 없이 일하는 두 녀석 중 하나는 몇 번을 버릴까 망설였다. 양옆으로 나란히 펼쳐져야 하는 날개 중 하나가 꺾여버렸기 때문이다. 꺾여버린 쪽에는 이따금씩 빨래가 너무 많아 공간이 부족할 때 양말이나 속옷처럼 가벼운 빨래만 널어둔다. 효용성이 한참 떨어져 버린 건조대이지만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볼 때마다 떠오르는 어떤 씁쓸한 기억과 거기에 따라붙는 경고 때문이다.


큰아이 초등학교 1학년때 같은 반 학부모로 만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어서까지 친하게 지내던 동네 언니가 있었다. 우리 집 아들 둘과 언니네 딸 둘은 친남매처럼 오순도순 때로는 티격태격 잘 지냈다. 늦은 밤까지 서로의 집을 오가기도 했고 몇 박 며칠 여행도 자주 다녔다. 마음도 잘 맞고 서로에 대한 배려도 참 깊다고 여겼다. 오래도록 좋은 친구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매년 11월이면 땡감을 몇 박스 샀다. 딱딱하고 떫은 감을 사다가 꼭지 부분만 남겨두고 껍질을 깠다. 길게 잘라놓은 실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대여섯 개씩 묶어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 널어둔 감들은 쪼글쪼글 말라가며 떫은맛은 사라지고 달달함만 남은 반건시로 변했다. 햇살과 바람이 가득한 20층 우리 집 베란다는 널려있는 감 덕분에 가을 시골집 앞마당 같은 풍경으로 쉽게 바뀌었다.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부른 풍경, 늦가을이었다.


반건시 작업은 동네 언니들과 주로 우리 집에 모여 함께 했다. 언니들은 감이 들어있던 박스에 씻고 깎고 묶은 감을 차곡차곡 담아 집으로 들고 갔고 각자의 베란다에 널었다. 어떤 이는 베란다를 확장한 탓에 거실에 널어두고 가끔씩만 문을 열어두어야 해서 곰팡이를 염려해야 했다. 어떤 이는 해가 잘 들지 않는 베란다라 색이 곱게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 반해 천혜의 환경인 우리 집 베란다는 감을 말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다들 우리 집 베란다를 부러워했지만 탐낼 수는 없었다. 이미 우리 감으로 베란다는 만원사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 가을, 친한 그 언니가 깎은 감을 자기 집으로 들고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안 가져간다고요? 그럼 이거 어쩌려고요?" 라며 황당해하는 나에게 언니는 당당히 말했다.

"너희 집 베란다에 널려고! 다 마르면 가져가려고."

언니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해서 당황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거절해야 옳았으나 그러지 못했고 불편한 마음을 안고 그 상황을 곱씹으며 이미 꽉 찬 건조대에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 언니몫의 감을 널었다.


그때부터 이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불편함들이 하나 둘 거슬리기 시작했다.

시댁 김장으로 녹초가 되어 집에 가고 있는 나를 불러 지인의 김장을 도와주러 가자고 끌고 가던 것.

나에겐 귀한 아들이건만 큰아이의 문제 행동들을 조목조목 꼬집어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것.

그 외에 자신이 즐겨보는 드라마를 나에게도 강권하고 요가시간을 꼭 맞춰서 같이 가자 하고, 30분이 넘는 샤워시간 동안 밖에서 기다리게 하던 것 등등...

사실 이전에는 전혀 거부감을 못 느끼던 것들이 온통 거북스럽고 불편, 불쾌했다. 그래서 거절이라도 할라치면 더 크게 불쾌해하는 언니였다.


감이 거의 말라갈 무렵이었다. 소임을 다하느라 지쳤던지 빨래 건조대 한쪽 날개가 풀썩 꺾여버렸다. 동시에 내 마음 한쪽도 확 부러져버렸다. 거절하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했던 마음은 회복하기 힘들었다. 잘 마른 감을 언니에게 전해준 뒤 서서히 연락을 끊었다. 언니는 이유를 궁금해하며 여러 번 연락을 했으나 난 끝까지 말해주지 못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언니 때문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나의 어리석음이 더 크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왜 진작 싫은 건 싫다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그 후회가 더 컸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마음이 부러지는 일도, 건조대가 부러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여전히 한동네에 살고는 있지만 이후로는 언니와 마주친 적도 일부러 연락한 적도 없다. 억지로 이어 붙인 관계는 결국 다시 부러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대신 이후에 갖게 된 새로운 인연 앞에서는 거부, 거절의 표현을 하려고 노력했다. 말이 안 되면 표정으로라도 말이다.


"유정 씨. 나랑 하루 바다 보러 안 갈래요?"라고 물어온 지인에게는,

"죄송해요. 바다를 보러 갈 마음의 여유가 안 생기네요..."라고 솔직히 말했다.

"오늘 시간 되니? 차 실까?"라고 묻는 친구에게는

"아.... 음...." 이러면서 난감해하는 신음을 발사했더니

"안되는구나? 그럼 다음에 보자~" 라며 쿨하게 퇴장했다.


SNL KOREA의 < MZ 오피스 >라는 코너에는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업무 중에는 에어팟을 빼고 일하라는 직장 상사의 조언? 꾸짖음? 뭐 그런 것에 아랑곳 않고 당당히 말한다.

"저는 노래를 들으면서 일해야 능률이 올라가는 편입니다."

근무 중에 음악을 듣지 말라는 잔소리에는,

"노래 안 듣고 있습니다. 이걸 끼고 일해야 안정감이 듭니다."라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한다.

MZ 세대를 향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지적이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는 입과 그에 어울리는 맑은 눈을 가끔은 장착하고 싶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듯,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않는 관계는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상대의 마음이 베일까 거절하지 못하면 결국 베이고 부러지고 망가지는 것은 나와 상대 모두의 마음과 관계이다.

그러니, 마음까지 부러지기 전에 때로는 맑은 눈 장착!





* 매거진의 이전 글

Jane jeong 작가님의 글입니다.

공작세 작가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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