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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Dec 28. 2023

화가 퍼진다

음식점 의자에 앉던 큰아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일 병원 좀 가봐야겠어."라고 말했다. 군에 있을 때 아들을 괴롭혔던 사타구니 염증이 재발했단다.

"많이 아프니?"
"화가 퍼져가지고..."
"열이 나?"
"아니? 열은 안나."
"그러면, 화가 퍼진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 확! 아퍼졌다고 말한 건데?"
"아... 난 또 열이 난다는 걸 말하는 신조어인 줄 알았어. 여기 너무 시끄러워서 잘 안 들리나 봐."


아들과 나의 대화를 듣던 남편이 깐죽거렸다.

"난 '확 아파졌다'라고 제대로 들었는데? 그런 건 시끄럽다고 안 들리는 말이 아니야. 맥락상 알아들어야지.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 뭐 해? 맥락도 파악 못 하고 말귀도 못 알아들으면서!"

어찌나 얄밉던지...

"내 인생 최대의 안티네 증말. 화가 퍼진다 화가 퍼져!"  라며 한참을 째려보았다. 


그러는 와중 지나가던 직원이 말했다.

"테이블에 있는 태블릿으로 주문하세요~"

"대기 예약 걸어놓는 앱에서 메인 메뉴 주문하게 돼 있길래, 거기서 했는데요... 다시 해야 해요?"라고 묻는 나에게 직원은 흘리듯 말하며 돌아섰다.

"안*&%$#^~~~"

안 해도 된다는 얘긴가보다 싶어 막걸리만 주문하고 한참 동안 기다렸다. 그때 한 직원이 다급히 뛰어와 물었다.

"막걸리만 시키시는 거예요? 다른 건 안 시키시고?"

직원이 흘리고 간 말은 주문을 안 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주문이 안 들어갔다는 얘기였다. 

남편이 또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책은 대체 왜 읽는 거냐면서... 

화가 퍼진다. 화가 퍼져.... 



작은아들과 운동을 나갔다가 너무 추워하길래 집에 갈 때는 버스 타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엄마 좋을 대로 해."

늘 심드렁한 반응을 하는 아들이 못마땅해 넌 왜 맨날 상관없다고 답하냐 했더니, 아들이 말하기를

"서순이 그렇잖아. 엄마가 먼저 물으니 내가 상관없다고 한 거지. 내가 엄마에게 물었으면 엄마도 상관없다고 할 거면서..."

"서순? 그게 무슨 말이야?"

"서순이란 말을 몰라? 헐..."

어떻게 그런 기본적인 단어조차 모를 수 있냐는 듯한 아들의 표정에 주눅이 들었다. 황급히 검색했다. 그런 단어는 사전에 없.었.다. 검색해 보니 카드 게임 방송에서 시작된 신조어라는 설명이 있었다. 최선이 아닌 카드를 냈을 때 순서대로 내지 않았다는 의미로 '순서'를 거꾸로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특정한 행동의 순서가 잘못되었을 때 비꼬는 말'로 통하고 있었다. 

이내 뻘쭘해진 아들을 향해 내가 만든 신조어를 날렸다.

"화가 퍼진다. 화가 퍼져..."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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