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크루 화요 갑분글감 < 꿈 >
기말고사를 끝낸 아들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글쓰기 과제 하나가 남아있는데 아주 골칫덩어리라고 했다. 마감기한까지 남은 시간은 8시간. 5페이지짜리 '학술적 글쓰기'인데, 한참 전에 의기양양하게 제출했으나 퇴짜를 맞았고 의욕이 확 꺾였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과제를 제출하지 않겠다면서 드러누웠다.
"원치도 않는 글을 억지로 쓰느니 차라리 안 낼 거야!!!"
누워있는 아들에게 무섭게 다가가니 아들은 벌떡 일어나며 뒷걸음질을 쳤다. 냅다 등판을 때려주었다.
"뭐래니? 너 백일장 나갔니? 학교 과제잖아. 네가 원하는 글을 쓰라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주는 글쓰기 수업의 과제! 별꼴이야 정말? 누워서 천장만 바라본다고 글이 써지니? 키보드 앞에 앉아서 뭐라도 써 나가야지. 그래야 생각의 물꼬가 트이고 다음 글이 써지지. 학술적 글쓰기가 별거야? 주제에 대해 근거도 없이 서술하지 말란 얘기잖아. 연구 논문을 참고해서 논리적인 글쓰기를 하라는 거야. 디베이트 입안문 많이 써봤던 거 떠올려서 그대로 쓰면 되지 뭐가 그리 어려워?"
등짝 스매싱에 정신 차리고 컴퓨터 앞에 앉은 아들은 교수님의 피드백을 보여주었다. A4 한 페이지 가득 써주신 피드백에는 교수님의 애정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요는 이랬다.
< 중간 과제를 가장 잘 한 학생이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 기대가 부담으로 작용했는지 학생의 글이 과하게 경직되어 있습니다. 철학과 전공과제라고 생각할 정도의 어려운 주제를 선정했고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보니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네요. 주제를 좀 더 좁게, 명확하게 다시 잡기 바랍니다. 파이어족과 노동의 가치로 좁혀서 써보는 게 어떨까요? 충분히 잘 쓸 거라 믿습니다.>
중간 과제 피드백 시간에 가장 잘한 과제로 뽑혀 학생들 앞에서 과한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고 자랑하더니 두 달 만에 "내 머리는 돌인가 봐. 아무 생각이 안 나. 난 완벽한 이과인가 봐."라며 소파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는 꼴이라니...
"네가 잘하고 싶다는 생각에 너무 힘을 줬기 때문에 교수님도 네 글이 잘 안 읽혔던 거야. 그렇게 힘겹게 쓰지 마. 그냥 써. 잘 쓰라고 과제를 주는 게 아니야. 앞으로 잘 쓰게 하기 위해 피드백을 주려고 쓰라는 거야. 수업 자체가 '대학 글쓰기'잖아. 그러니까 '학술적 글쓰기'라는 말에 너무 중압갑을 느끼지 말고 그냥 편하게 써 편하게. 일단 써야 피드백도 받을 수 있는 거잖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아들이 과제를 끝낼 때까지 나도 내 노트북 앞에 앉아 브런치 화면을 띄워놨다. '너는 싫더라도 과제를 하거라. 엄마는 행복한 글쓰기를 할 테니.'랄까? 이건 뭐.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도 아니고... 아들은 한 문단을 쓰고 한숨을 쉬며 내게 질문을 하고, 두 문단을 쓰고 머리를 쥐어짰다. 그렇게 저녁 4시부터 시작된 글쓰기는 마감시간을 30분 남긴 밤 11시 30분에 끝났다.
비단 글쓰기 과제 앞에서뿐만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혹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말이 참 싫었다. 방황할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할까 말까 고민할 시간에 일단 시작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방법이 떠오르고 길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나의 쓸모를 찾는 게 인생 아니던가. 나의 쓰임새를 훗날 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발현하겠다는 이유로 현재 나의 쓰임새를 방치하는 것은 내 인생에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
이런 내 생각이 기성세대의 잔소리일 수도 있다.
신해철은 생전 <속사정 살롱>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미래가 없는 노동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젊은 사람들이 직장이 없으면서도 막상 힘든 일은 하지 않는다고 비판을 하는데, 이걸 정신력이 약하다고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한다. 당장 나가서 일하면 돈을 벌 수는 있겠지만, 내가 다른 계획을 세울 수 있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상태에서 땀을 흘리는 것과 아무것도 디자인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늘 하루 노동을 하는 것은 다르다. 몸이 힘들어서 그런 노동을 안 하는 게 아니다. 꿈과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신해철의 주장에 윤종신은 반박했다.
"뭐든 해보는 것도 디자인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이 주는 교훈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원하던 일이 아니라며 아무것도 안 하고 넋 놓고 있으면 자극에 둔감해지며 생각회로마저 정지된다. 그러다가 의욕이 꺾이고 꿈마저 접게 되지 않을까?
신해철의 말대로, 충분히 꿈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변 상황에(가령 복지 같은)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꿈꿀 자유가 있는 것이 청춘일까?
헤매는 청춘에게 필요한 것은 하기 싫은 일이라도 일단 하면서 꿈을 꾸고 놓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꿈을 지키며 신념대로 사는 것일까.
잔소리와 함께 화두만 던져놓고 답을 주지 못하는 지금의 나는, 쓰임새를 다 하고 있는 걸까?
한 줄 요약 : 움직여야 꿈에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꿈이 생겨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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