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베이트 시간에 아이들을 지켜보면, 아무 말 대잔치로 끝마칠지라도 평소에 자신이 갖고 있던 소신을 전하고 상대의 말에 반박하는 과정을 즐긴다. 호전적인 아이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평소에 말이 없던 아이도 본인이 관심 있던 주제가 거론되는 순간 뜬금없이 흥분하거나 한마디 거드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은 논쟁을 좋아한다'라는 주장보다는 '누구에게나 생각이 있다'라는 결론에 이른 이유다.
디베이트 강사인 나의 역할은, '생각이 있는' 아이들의 말문을 트이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려면 첫 시간에는 자료조사가 필요한 어려운 주제보다 배경지식 없이도 의견을 낼 수 있는 주제를 제시해야 한다. 디베이트의 특성상 찬성, 반대 중 자신이 원하는 입장에서 주장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러더라도 상관없는 주제, 상대의 주장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주제 말이다. 학생들에게 원하는 주제를 정해보라고 주문하면 논쟁거리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탕수육 부먹 vs. 찍먹
후라이드 치킨 vs. 양념치킨
짜장면 vs. 짬뽕
비냉 vs. 물냉
마라탕 vs. 마라샹궈
이쯤 되면 한 학생이 용기 내어 소리친다.
"그걸 논할 시간에 빨리 먹어라!!!"
그러면 이번에는 커플 간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깻잎 논쟁
패딩 논쟁
새우껍질 논쟁
블루투스 논쟁
실제로 한 학급에서는 깻잎 논쟁으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정확한 주제 문장이 필요했는데, 아이들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누구의 깻잎을 떼어주는지가 중요하니까, 여자사람친구의 깻잎을 떼어줘도 된다고 해야 해요."
"야! 사람 친구가 여자만 있냐? '남자여자사람친구의 깻잎을 떼어줘도 된다'라고 해야지."
"그렇게 길면 안 되니까 '이성친구의 깻잎을 떼어줘도 된다'라고 하자."
"누가 떼어주는 것인지도 넣어야지. '남자 친구, 여자 친구가 이성친구의 깻잎을 떼어줘도 된다'라고 할까?"
"'애인이 이성친구의 깻잎을 떼어줘도 된다'라고 하자."
그 어떤 주제보다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즐거운 논쟁이 이어졌던 날이다.
빨대 구멍 개수가 하나이든 둘이든, 어떤 주장이 더 합리적인지 논리적인지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빨대를 이용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구멍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구멍이 둘이라고 주장하는 상대가 평생의 원수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내 생각대로 떠들지만 다 같이 즐겁다.
일찍이니 이찍이니 하는 문제도 그랬으면 한다. 서로 다른 생각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으면 좋겠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빨대 구멍 개수를 논하는 게 빨대 기능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과는 달리, 누구를 뽑느냐의 문제는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니 진지하게 핏대를 올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구멍이 하나이냐 두 개이냐만큼 몇 번을 찍는지도 아무 상관없는 문제가 된 지 오래 아니던가? 정치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