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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31. 2023

카프리썬을 앞에 두고 왜 먹지를 못하니...  

백 열아홉 번째 시시콜콜 디베이트

올 한 해 동안 용인의 모 중학교에서 중1대상 주제선택 수업을 하고 있다. 본인이 선택한 강의를 매주 월요일마다 9주 동안 듣는 자유학년제 프로그램인데 디베이트 수업이 개설되었다. 총 17차시 중 내가 8차시를 맡아 진행하고 나머지 9차시는 학교 선생님께서 맡는다. 17차시 중 초반 8차시 동안 나는 학생들에게 디베이트가 뭔지, 배우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가르친다. 2차시씩 4회의 수업동안 두, 세 개의 주제로 토론한 학생들은 디베이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대략적인 흐름을 알게 된다. 지난 3분기까지 160여 명의 1학년 학생 중 80명 정도가 수강했다. 연말에 있을 교내 토론대회를 착실히 준비 중인 학생들이다.


2학기 두 번째 분기가 시작되었다. 총 4번의 모집과 4번의 주제선택 분기가 이어졌는데 이번이 마지막 분기였다. 24명의 학생들이 모였고 유난히 호응도와 분위기가 좋았다. 3월에 만난 중1학생의 풋풋함 대신 곧 2학년이 될 학생들의 능글맞음이 수업을 꽤 활기차게 만들었다.


첫날 수업의 마지막 순서는 함께 토론할 주제 정하기다. 학생들의 관심사 혹은 내가 준비한 주제 중 투표를 통해 선정하게 된다. 첫 분기에는 '진로를 선택할 때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와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류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라는 주제로 토론했다. 숫기 없는 신입생이라 내가 준비한 그대로 하겠다고 했다. 두 번째 분기부터는 학생들이 직접 토론주제를 정했다. '동물실험을 금지해야 한다'와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라는 주제였다. 세 번째 분기 때는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공개를 확대해야 한다'와 '청소년범죄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라는 주제로 토론했다. 학생들의 관심사, 토론하고자 하는 주제가 다양하면서도 진지해서 사뭇 놀라웠다.


이번에 만난 학생들에게도 원하는 주제를 물었는데 다양하고 많은 의견이 나왔다.

'러시아의 무기 생산을 막아야 한다'

'디베이트를 정규교과로 해야 한다'

'한국은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

'초중고 학생의 일기 쓰기를 의무화해야 한다'

'학교 체벌을 부활해야 한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금지해야 한다'

'코로나 19 백신 접종을 계속해야 한다'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허용해야 한다'

'통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수능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학교를 없애야 한다'

'여가부를 폐지해야 한다'


위 주제들을 제치고 압도적인 지지로 선정된 두 개의 주제는,

'학생 복장, 두발, 화장을 자율화해야 한다'와 '카프리썬의 종이빨대를 다시 플라스틱 빨대로 바꿔야 한다'였다.

'학생 복장, 두발, 화장을 자율화해야 한다'라는 주제는 학생 인권과 관련하여 오래전부터 다루었던 고전적인 주제이다. 여전히 많은 학교가 학생들의 화장, 파마, 염색에 대해 제재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학생들에게는 절박하고 시의성 높은 주제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두 번째 주제에 대해서는 상황파악이 잘 안 됐다. 카프리썬보다는 카프리를 더 많이 마시는 나이의 자식을 둔 강사의 한계였다.


"카프리썬의 빨대가 종이로 바뀌었어요?"

- 네! 그런데 거의 테러 수준이에요. 전혀 꽂히지가 않아서 완전 짜증 나요.

- 엄청 심각한 문제예요. 저희는 이걸로 반드시 토론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초흥분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 주제를 조금 더 확장해서 카페 종이 빨대 사용이나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 문제로 확대해 볼까요? 카프리썬 빨대로만 한정해서 토론하다 보면 현타가 올 수도 있어요. 논의할 내용이 너무 적을 수 있거든요..."

- 안 돼요. 이 주제는 반드시 카프리썬에 대한 내용이어야 해요.

- 맞아요. 다른 곳에서 주는 종이 빨대는 관심 없어요. 카프리썬 빨대 얘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 너무 열받는 문제란 말이에요!!!

- 빨대만 종이로 바꾸면 뭐해요. 포장이 비닐인데. 정말 어이없어요.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토론은 찬반으로 나뉘어야 하고 특히 디베이트는 찬성과 반대의 입장 중 여러분이 원하지 않는 입장을 맡게 될 수도 있다는 점, 알고 있죠? 즉 이렇게 흥분한 여러분 중 누군가는 종이빨대를 유지하자는 입장에서 주장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 아... 맞다...

- 그래도 이 주제로 토론해보고 싶어요!!!


결국 학생들의 의견대로  다음 시간에 '카프리썬의 종이빨대를 다시 플라스틱 빨대로 바꿔야 한다'라는 주제로 토론하기로 했다. "카프리썬~~ 우리들의 친구~~"라는 옛날 광고 카피대로 카프리썬은 청소년들의 친구였나 보다. 친구의 달라진 모습에 이렇게 심하게 흥분하다니...

다음 시간까지 나는 이 주제가 왜 논란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 PPT를 준비하고 근거로 활용할 읽기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 나야말로 현타가 오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하지만 잠깐의 검색으로도 이 문제가 카프리썬 애호가들에게는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었다. 카프리썬에 종이 빨대 잘 꼽는  비법 영상까지 나왔을 정도.

집에 와서 이 우스운 주제에 대해 얘기하니 남편도 거들었다.

"안 그래도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어. 당신이 어디에서 받아왔는지 우리 집 냉장고에 카프리썬이 하나 있었거든? 출근하면서 차 안에서 먹으려는데 빨대가 안 꽂히고 구부러지고 난리여서 그냥 버렸잖아."


우습게 봤던 이 주제는 꽤 시의성 있고 심각한 논제임이 분명했다. 단순히 플라스틱 빨대와 종이빨대의 싸움이 아니었다. 불편함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었다. 현실성 없는 일회용품 사용 규제의 문제점, 플라스틱 대체제인 친환경 제품의 실체와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는 좋은 주제였다. 이 좋은 주제를 내가 어떻게 준비해 가는지가 관건이다. 카프리썬에 갇힌 중학생들의 아무 말 대잔치가 되지 않도록, 카프리썬 얘긴 줄 알았는데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 문제를 둘러싼 심도 깊은 주제였다는 자각을 할 수 있도록...


점심시간이 끝나고 졸음이 몰려오는 5,6교시에 수업을 하는 나는 학생들 모두에게 나눠줄 초콜릿을 준비하곤 한다. 다음 주에는 주제에 맞게, 카프리썬을 나눠줘야겠다.


그래서 백 열아홉 번째 시시콜콜 디베이트 Topic은...

< 카프리썬의 종이빨대를 다시 플라스틱 빨대로 바꿔야 한다 >


* 농심 측도 이런 소비자 불만을 받아들여 오는 9월 카프리썬 빨대를 교체한다는 방침이다. 농심 관계자는 조선닷컴에 “펄프 양을 늘리거나 빨대 꽂는 부분의 각도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불편을 해소할 예정”이라며 “카프리썬은 생분해 인증받은 종이빨대를 쓰고 있으며, 이 재질은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2023.06.17자 기사)

- 사진출처 : 농심 브랜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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