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기사가 진통을 호소하는 만삭의 산모를 자리 뒤편에 앉혔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너무 막혀서 산모는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하였고 기사는 뾰족한 수가 없었으므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첫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범운전자 표창까지 받은 자신이었으므로 신호를 지켜가며 과속을 자제하고 교통질서를 위반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가는 방안, 두 번째는 위기에 처한 산모와 태어난 아기의 생명까지를 고려해서 비록 나중에 벌칙을 받더라도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방안이 그것이다.
우리가 운전기사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일반적으로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옳다고 믿는 보수성향의 운전기사는 첫 번째 방안을 선택할 것이고, 법원칙보다 사람의 생명이 우선한다는 믿음을 갖는 좌파적 사고에 있는 기사는 후자를 선택한다고 보면 맞다. 논리가 그렇다는 것이어서 보수와 좌파의 구분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 성향으로 구분하자면 그렇다. 그런데 전자보다 후자에서는 왠지 모르게 사람냄새가 난다.
흔히 우리가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보수주의란 기존 질서를 지키며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한 바 있다. 따라서 기존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법과 질서가 존중되어야 하며 사회나 국가는 이런 바탕 위에서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런 이유로 프랑스혁명이 오랜 기간 인류 역사에서 유지되어 온 질서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터무니없는 도발로 인식된 것은 그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이를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인간사회의 기존 질서를 뒤집은 사건으로 규정하며 역사의 흐름에 반하는 혁명이라고까지 불렀다. 기존질서를 뒤집으려는 시도는 적어도 그에게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엄청난 사건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버크에 의해 탄생한 보수주의는 대부분 국가에서 기득권층 혹은 중산층 이상의 집단에서 그 특징을 보이고 있는바 그들은 성장을 통해 이익을 공유하고 보유하고 있는 유무형의 권한과 자산을 지키거나 더 늘리려는 인간적 욕구로 인해 기존질서가 급격히 변화하거나 혹은 위태롭게 되는 상황을 거부하고 안정 속에서 살아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보수주의가 버크에 의해 시작이 되었다고 하면 좌파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마르크스(K. Marx)를 시작으로 본다. 물론 마르크스 이전에 진보적 성향의 학자나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V. Lenin)으로 이어지는 좌파진영의 사상적 전통은 그들에 의해 정통성이 유지되었다고 보는 데 크게 틀림이 없다.
좌파진영에서 마르크스가 노동자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을 주장했다면 레닌은 마르크스가 간과했던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를 통한 세력의 과시와 혁명의 저변을 넓히는 전략을 마련했다. 레닌의 역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는데 그는 오늘날 우리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의 집권 노동당과 같은 핵심 세력이나 노동계의 노조, 교육계의 교육단체 등에서 핵심 일꾼을 결집시켜 혁명의 리더 역할을 하는 소위 전위세력의 등장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중국의 공산당, 북한의 노동당 같은 국가를 통치하는 핵심세력인 정치집단이나 우리나라의 민노총이나 한노총, 그리고 전교조 같은 특정 직업군을 대표하는 세력의 결집도 레닌의 전위이론이 바탕이 되었다. 수많은 역사가와 정치평론가들이 레닌을 정치가라기보다 전략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 외에 또 주목할 인물이 오늘날 좌파진영의 이론적 멘토 역할을 하는 그람시(A. Gramsci)이다. 특별히 그가 역설한 문화와 교육 분야에서의 헤게모니 장악, 진지전, 기동전 같은 권력 쟁취를 위한 실행 전술과 전략은 오늘날 좌파진영이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혁명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 합법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정권을 쟁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 세계 좌파세력이 포퓰리즘 같은 선동적 정책으로 선거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획득하는 데에 그람시는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보수와 좌파 양 세력이 각자 이런 탄탄한 이론적 배경을 갖고 있는바 과연 두 진영의 싸움에서 진정한 승자는 누가 될까? 서로 다른 이론으로 무장한 세력이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 집권세력이 되어 있는 분단의 현실 속에 있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답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통일을 생각하는 분단된 국민의 처지에서 보면 각자 자신이 살고 있는 체제가 주도하는 통일방식을 당연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3대 가는 부자 없다”는 말이 있다. 지키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래도 요즘은 여러 가지 제도나 법률적 보장으로 인해 기득권이나 재산 같이 유무형의 자산을 지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내부에서 기강이나 도덕의 해이로 인한 붕괴를 막을 방법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재벌가 2세와 3세들의 탈선 행태를 보면서 ‘저런 위인들이 운영하는 기업이 오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주변에도 할아버지나 아버지 세대에는 제법 괜찮게 살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니 성장시키기는커녕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기존의 질서, 가치,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전 세대 못지않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데 이미 안정과 안락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나 집단들에서 그런 필요를 망각하는 경향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보는 것처럼 구기업의 몰락과 새로운 기업의 탄생, 그리고 정치권에서 정권의 교체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흔히 “보수집단은 부패로 인해 몰락하고 좌파는 분열로 인해 붕괴한다.”는 말이 회자된다. 이 말은 한동안 옳은 것으로 인식되었고 많은 학자들조차 이것을 의심 없이 인용하곤 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에 걸친 기간 동안 영국의 산업화와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을 통해 유럽에서는 ‘계급(Class)’이라는 시대를 이해하는 상징어가 등장했다. 그 결과 신분의 차이와 부의 소유에 따른 계급의 구분은 물론 좌파진영 내부에서도 사회주의, 노동계급 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등의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숙련노동자나 수공업 기술자들과 새로이 노동시장에 들어선 시골에서 도시의 공장지대로 흘러들어온 미숙련 노동자 사이에 심각한 차별이 존재했다.
또한 이런 갈등 못지않게 노동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지배했으므로 성평등과 여성의 공적 참여는 방해받았고 여성의 지위는 사실상 평가절하 되거나 무시되었는데 이런 경향은 당시 노동계급 사이에서조차 낯선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의 노동운동은 한편으로는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와 권위, 집단적 힘에 호소하면서도 실제로는 더 협소하고 배타적”이었다는 주장이 등장하곤 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좌파집단 내에서 갈등과 대립은 낯설지 않았는데 좌파의 분열이라는 개념은 이런 역사성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소위 귀족노조의 존재와 원청근로자와 하청노동자 간 구분과 임금과 복지를 둘러싼 전근대적인 갈등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9세기 유럽의 노동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후진적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를 보면 보수는 집단 내부에서 갈등과 대립으로 분열되고 있는 가운데 좌파세력은 오히려 결집해서 끈끈한 응집력을 보인다. 물론 양 집단 모두에게 ‘부패’는 피하지 못하는 공통어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좌파진영은 세력의 확산을 위해 오래전부터 끊임없는 연구와 활동으로 대중을 지배할 화두를 선점하고 정책화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Forging Democracy》 (‘민주주의의 구축’ 쯤으로 번역한다)라는 제목으로 2002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에서 출간한 서적이 있다. 출간이 된 지 벌써 만 20년이 넘었으니 시간이 꽤 흐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라는 더 매력적인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책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유럽을 휩쓸던 1848년부터 유럽에서 좌파의 전통이 몰락한 2000년까지 약 150여 년 동안 유럽에서 펼쳐진 사회주의 이념과 활동의 역사를 집대성한 대작이다.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 The Communist Manifesto》이 발표된 해가 1848년이란 사실과 민주주의와의 이념경쟁에서 좌파세력이 몰락한 사건인 ‘냉전’이 종식된 20세기말 무렵이라면 왜 이 기간이 연구대상으로 선정되었는지 실감이 난다.)
이 저술은 영국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서섹스(Sussex)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 석좌교수로 활동한 제프 일리(Geoff Eley)가 2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집필한 것으로 번역본이 1,0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이다. 독일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영국, 이태리, 프랑스의 좌파세력의 태동과 활동, 그리고 몰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분석하면서 참고한 자료만 2,000권이 넘는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라는 이념을 수단으로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과 사회주의 블록 간 오랜 체제경쟁을 통해 이미 몰락해 버린 것으로 인식된 좌파에 대한 이런 연구가 실행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냉전의 종식이 좌파가 몰락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체제 내부에서 경제, 사회, 문화, 노동 등의 영역에서 좌파가 등장하였고 경쟁하였으며 앞으로도 공간 확보라는 노력을 통해 좌파세력의 지속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비록 일본계 미국의 정치학자로 하버드대와 스탠퍼드 대학의 교수를 지낸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1989년에 발표한 논문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이 오래지 않아 순진한 전망인 것으로 평가된 가운데 정치사적 사건으로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그 후에도 좌파세력은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할 여지가 있다고 일리교수는 분석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사회 내부에서 보듯이 좌파진영이 세력 확대를 통한 정치, 사회, 경제, 노동, 문화 등 분야에서 공간 확보와 적절한 정책을 통해 지지세력 확산을 지속하는 노력에 집중하는 한 보수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런데 보수 세력의 현실은 어떤가. 보수집단은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서서히 몰락해 가는 모습이다. 미국과 서유럽 등에서 보듯이 국제사회의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냉전의 종식 이후 이념대립과 체제경쟁에서 승자의 지위에 있던 대한민국의 보수 세력도 자멸하며 몰락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단지 진보세력의 집요함과 결집하는 능력과 비교해서 얘기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원인은 무능, 부패, 매너리즘 등 전통적인 보수 기득권 세력에서 드러나는 특징과 함께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내고 추진하는 능력에서 상대적 열세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실은 벌써 20~30년도 넘은 일이지만) 국공립 도서관이나 학교 도서관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념성향을 띠고 있는 간행물은 좌파가 독점한 지 오래다. 주간이나 월간, 격월간은 물론 학술서적들 조차 아무리 적게 보아도 70~80% 이상이 진보성향의 인물이나 집단들이 중심이 되어 발행하는 출판물들로 서가가 채워져 있다.
그들은 과거 보수 세력이 간과하고 있던 페미니즘, 젠더, 인권, 새로운 정치, 1968년 혁명, 신 사회운동, 문화, 교육, 산업화, 자연과 환경, 청년실업 등의 화두에 천작하며 다양한 이슈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정책화하면서 활용해 왔다. 보수가 냉전기간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관심을 쏟았던 안보, 군사, 국방, 법질서 등의 화두와는 ‘일반인들의 관심사’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러니 다수의 지지를 목표로 하는 사활을 건 싸움의 결과는 (그것이 선거나 혹은 여론전이든) 전문가가 아니어도 예측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위기는 그 원인이 확실한 것이다.
게다가 보수집단은 분열과 대립이 일상화되어 있다. 희한안 일이다. 과거에 진보세력이 자기들끼리의 선명성 경쟁으로 싸우다 몰락했다면 오늘의 보수 세력은 크게 차이도 없는 가치논쟁과 효용성도 없는 이슈를 놓고 서로 간 치열한 정통성 경쟁을 하며 중장년의 전통적 지지 세력은 물론 청년세대들로부터도 외면을 받고 있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에 대한 연구는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을까? 제프 일리교수의 연구만큼은 아니더라도 비교하는 것조차 불필요한 처지에 놓여 있다. 학자들조차 돈과 명성을 쫓는 실정이니 정치인들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오늘도 전통적 보수 세력들은 집단의식 속에 빠져 자신들에게만 익숙한 화두를 꺼내 효율과 성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딱하지만 지금이 그런 시대일까. 지금은 자신들이 무능 속에 풍요를 즐기는 가운데 빼앗긴 화두를 찾아와서 보수의 눈으로 다시 해석해서 진보세력과의 싸움에서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가 아닐까.
한두 가지 사례로 페미니즘을 수단으로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 진보세력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 출산 후 재취업, 직장에서의 성 평등과 같은 여성의 권익과 권리 이슈를 보수의 시각에서 해석하여 좌파세력과 일전을 불사해야 하지 않을까. 좌파세력이 장악한 ‘문화’라는 공간도 보수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전의를 불태워야 한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 이미자가 '동백아가씨' 노래로 전투에 참가 중이던 황소 같은 젊은 군인들의 눈에서 눈물을 쏟게 만든 것처럼 BTS 같은 청년세대의 아이콘을 보수의 시각에서 재해석해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활용할 수 있는 수많은 문화적 자산을 왜 좌파진영에 빼앗기고 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노동현장에서도 부패한 귀족노조의 존재와 원청근로자와 하청노동자 간 계급 구분과 임금과 복지를 둘러싼 갈등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9세기 유럽의 노동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전근대적인 후진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최근 ‘MZ노조’로 불리는 《올바른 노동조합》의 등장과 약진은 그동안 좌파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노동시장에서도 틈새를 공략할 환경이 구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보수주의자들은 아스팔트 위의 전사가 되어 뙤약볕 아래서 동년배의 연령층을 앞에 두고 ‘과거’를 외치고 있다. 과거에 아스팔트가 젊은 좌파들의 전유물이었다면 오늘날엔 중장년 보수주의자들이 아스팔트로 나서고 있다. 이래서 ‘냉전의 종식’이라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굴욕을 맛본 진보세력과의 생존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보수 세력이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러시아에서 성공한 노동자 혁명은 레닌의 전략도 평가받을 일이지만 당시 러시아의 국가체제가 격렬한 노동운동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만큼 취약한 구조였다는 사실이다. 의식 있는 전통적 좌파 지지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기행적 좌파세력이 횡행하는 이 땅의 현실에서 보수집단은 그런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