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영국에 처음 가서 영어를 배울 무렵 같은 집에 세 들어 살던 맥마흔(McMahon)은 매주 금요일 주급을 받은 날에는 저녁에 펍에서 맥주 한잔을 같이 하자는 말을 새로 여자 친구가 생기기 전까지 잊지도 않고 해댔다. (이들 커플의 결합에 대해서는 이전 글 “그들이 동거하는 이유”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는 고향 아일랜드에서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와서 건축공사장의 주급노동자로 일하던 중이었다.
맥마흔과 나 둘 모두가 고향을 떠나 타국에 온 외로운 처지에 있던 터라 우리가 흔히 ‘Fish and Chips’라고 부르는 영국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인 생선과 감자튀김에 맥주 한잔을 겸한 게 전부인 펍(pub)에서의 식사는 나름 향수를 달래주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서로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때마다 다양한 주제에 관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속으로 놀란 적이 많았는데 건축공사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수준 높은 것이었지만 정작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어느 날은 아일랜드의 역사를 이야기하다가 강대국에 인접한 약소국이라는 우리나라와 아일랜드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점에 공감하기도 하였고 그런 결과로 인해 음악이나 문학사조도 비슷한 경향을 띤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탄압과 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인들이나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나 혹은 멀리 미주대륙으로 이주한 우리 선조들의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알았다.
지금은 아일랜드 섬조차 영토가 분리되어 있어서 거주인 다수가 아일랜드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편입되어 있는 현실도 남북한으로 갈라진 우리와 비슷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United Kingdom, UK)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4개의 지역으로 구성된 연합왕국이다).
하루는 그동안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근현대사를 포함한 역사와 사회제도, 경제문제, 여성의 권리,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인물들의 활동 등을 아우르는 그의 지식을 칭찬하며 어떻게 학습하였는지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며 가당치도 않은 말이라며 버나드 쇼를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은 어릴 적부터 꾸준히 독서를 하고 생각하는 습관 속에서 얻어진 것일 뿐이며 자신은 아일랜드 사람들의 그저 평균치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라며 겸손해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록 어려운 처지라 하더라도 목표를 위해 꾸준히 노력을 하면 좋은 시절이 올 거라는 상식적인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지낸다고 했다. '그것이 신이 우리 인간들을 외면하지 않게 하는 방식이라며.'
사람들은 살면서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서의 성취가 가능할까?
대부분 사람들이 한 가지도 채 이루지 못하는 인생의 목표를 어떤 이는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될 만큼의 큰 성과를 낸다. 인간은 모두 균등하게 하루 24시간을 갖지만 그들의 타고난 재능과 그칠 줄 모르는 노력은 어느새 평범한 사람에 비해 저만큼 앞서 있다.
그런데 어떤 이의 성공사례는 주변의 도움이나 협조,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지원과 집안이 보유한 자산의 배경이 성취의 꽤 큰 몫을 차지하는 경우가 있어서 공정한 평가를 받기 어렵다. 심지어 작위적으로 마치 꽤나 능력이 있는 인물인 듯 만들어 내는 경우도 빈번해서 공감을 얻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러나 특별할 것 없는 배경 속에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성과를 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7.26-1950.11.2)는 역경 속에서 불굴의 노력을 통해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셰익스피어가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면 쇼는 아일랜드 국민들로부터 셰익스피어 못지않은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버나드 쇼는 아일랜드 태생이지만 청년기부터 생애의 대부분을 잉글랜드에서 활동하였으며 셰익스피어 이후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불린다.
당시 유럽의 주류사회에서 변방쯤으로 인식되던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태어난 쇼는 어린 시절 부친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몰락하여 기본 교육과정만 겨우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와서는 특별할 것 없는 업무에 종사했다. 그런 가운데 일이 없는 날에는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보냈다. 그는 일생을 살면서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여건 속에서 지대한 성과를 낸 인물이었는데 든든한 후원자나 특별한 배경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꾸준한 노력과 성찰로 문학, 도덕, 철학, 정치논설, 종교, 심지어 음악 평론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또 사상가로 성장했다.
쇼는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수필가, 비평가로서 평생 60여 편의 희곡도 썼는데 1925년에는 작품 《성녀 조안, Saint Joan》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의 노력과 헌신에 답이라도 하듯이 아일랜드 사람들은 고난을 극복하고 위대한 결실을 이뤄낸 그를 ‘아일랜드의 보물’로 칭송한다.
쇼는 관념에만 치우치지 않은 실용주의자였으며 사물의 양면을 볼 줄 아는 균형감을 갖춘 실천하는 활동가로 자신이 살았던 사회와 시대를 정확하게 꿰뚫은 지식인이자 비평가이기도 했다. 그는 사회개혁가로 당시 왕실이 중심이 되어 사회와 제도, 그리고 문화적 실체를 단속하고 검열하려는 시도를 거침없이 비판하였고, 계몽과 개혁을 통한 이념실천을 활동방법으로 선택한 온건한 좌파 단체인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 소속의 사회주의자로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낡은 가치관에 반기를 들기도 했는데 실제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소설 《바람둥이, The Philanderer》 같은 많은 작품 속에서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그는 제1차 대전 기간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념 전쟁에 동원되어 적국에 대한 무분별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광기에 휘말렸을 때에도 상식적이지 못한 여론을 반대하며 국민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고수한 드문 지성인이었다.
1904년에 발표한 작품 《인간과 초인, Man and Superman》에서 돈 주안이 악마에게 하는 말 중 일부 인 아래 대목은 그가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종교와 철학, 그리고 도덕을 아우르는 내용으로 1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인간사회에 온전히 적용하는데 무리가 없을 만큼 핵심을 찌르는 버나드 쇼다운 냉철함과 풍자를 느끼게 하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네 친구들은 신앙이 없다. 신도석만 차지할 뿐이다. 윤리도 없다. 타성에 젖어 있을 뿐이다. 지조도 없다. 겁쟁이일 뿐이다. 심지어는 악인도 못된다. 심약할 뿐이다. 예술도 모른다. 욕정에 눈이 멀었을 뿐이다. 성공한 것도 아니다. 그저 돈이 많을 뿐이다. 용기도 없다. 티격태격할 뿐이다. 주인 의식도 없다. 그저 위세나 부릴 뿐이다.”
그러나 그의 유토피아적 정신은 현실을 견디지 못했고 쇼는 공허한 구호로 기만하는 습관과 야만적 본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에 절망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쇼는 촌철살인의 유머를 잊지 않는 삶을 지속했는데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사회진화론과 맞물려 호전주의를 자극한 ‘우생학’ 논쟁이 한창일 때 천재로 손꼽히던 쇼에게 미모를 갖춘 미국 출신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의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나면 근사하겠지요?”라는 말에 “아니요,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날 수 도 있겠지요.”라고 대답한 것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맥마흔이 나와 헤어진 이후에 버나드 쇼처럼 훌륭한 인물로 성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가족들과 이별하고 고향을 떠나 비록 공사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주급노동자 신분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쇼 같은 입지전적인 인물을 항상 머릿속에 새겨두고 자신의 신념처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을 거라는 데는 조금의 의심도 없다. 변방의 작은 국가 태생으로 특별한 배경 하나 없이 자신만을 의지한 채 타국을 떠도는 운명을 가진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런던에서의 버나드 쇼처럼 스스로를 부단히 채찍질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역경을 이겨낸 평범한 천재였던 버나드 쇼는 신이 자신에게 부여해준 재능으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94세의 나이에 신의 부름을 받았다.
ps : 원문이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으로 흔히 우리가 “우물쭈물 살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로 알고 있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우리나라에서 오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을 전문가들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나는 알았지. 무덤 근처에서 머물 만큼 머물면 이런 일(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정말 오래 버티면(나이 들면) 이런 일(죽음)이 생길 줄 내가 알았지.”
각자 판단해 보시길 바란다.
(사진은 구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