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월드컵 결승전. 장소는 모스크바에 위치한 루즈니키 스타디움.
역사상 처음 월드컵 결승전에 진출한 국가는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던 크로아티아. 상대는 무적 프랑스였다. 프랑스로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이어 3번째 치르는 FIFA 월드컵 결승전이었다.
크로아티아는 사상 처음으로 진출한 월드컵 결승전. 축구팬들의 입장에서는 결과를 예상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겠지만 프랑스로서는 상대방 전력을 예상하지 못했던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셈이다.
크로아티아는 예선에서 강호 아르헨티나를 3:0으로, 아프리카의 복병 나이지리아를 2:0으로 꺾고, 북유럽의 신예 아이슬란드마저 2:1로 격파하고 조 1위로 예선을 통과했다.
이어서 16강전, 8강전, 준결승전 경기에서는 세 경기 모두를 연장전까지 치르는 혈투 끝에 덴마크(3:2)와 주최국 러시아(4:3), 그리고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도 승리를 거두며(2:1) 마침내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돌풍을 일으킨 국가였다.
예상대로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막강한 화력을 갖춘 프랑스는 대회 최우수 선수상을 받은 앙투안 그리즈만을 비롯해 올리비에 지루, 그리고 킬리안 움바페 등이 폴 포그바가 중원을 책임지고 있는 미드필드 군단의 지원을 받으며 크로아티아의 골문을 두드려 댔다. 90분의 혈투 끝에 결과는 4:2로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골득실로만 보면 프랑스의 일방적 승리 같아 보이지만 프랑스 수비진은 마리오 만주키치, 이반 페리시치, 그리고 크로아티아 축구 역사상 최고 선수로 기억될 주장 루카 모드리치의 공세에 전 후반 경기 내내 진땀을 흘렸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경기장에 주저앉아 통한의 눈물을 쏟아내던 선수들을 크로아티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는 선수 한 명 한 명을 안아주며 모국의 국민들을 대신해 위로와 격려의 인사를 건넸다.
마침내 눈물을 거두고 경기장을 떠나며 고국에서 달려와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응원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국민들을 바라보던 만주키치와 모드리치의 슬픔이 가득하던 애처로운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쉽지 않은 상대들이었지만 크로아티아 선수들에게는 운동장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경기에서 꼭 승리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크로아티아는 1991-1995년 기간 유고연방의 해체에 따른 독립전쟁을 치렀고 큰 피해를 입었다. 인명의 손실은 가정마다 전쟁의 상흔이 짙게 드리워지도록 만들었고 국민들에게는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줄 대상이 간절히 필요했다.
크로아티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교회와 성당의 종탑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하나로 묶고 동기를 부여해 줄 충분한 에너지가 되지 못했다.
모스크바로 떠나는 크로아티아 전사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몫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예선 첫 경기에서 만난 전통적인 남미의 축구 강호 아르헨티나는 투지가 넘치는 크로아티아 전사들의 첫 번째 제물이 되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하며 차례로 상대들을 무너뜨렸고 4백여만 크로아티아 국민들은 매 경기마다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며 뛰는 모습에 열광했다. 국민들의 간절한 기도와 염원을 등에 없고 11명의 전사들은 경기 종료의 휘슬이 들릴 때까지 운동장 곳곳을 쉼 없이 휘저었다.
주최국 러시아 국민들의 응원이나 축구 종가 잉글랜드의 전술도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등에 업은 이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크로아티아는 그렇게 전쟁의 상흔을 점차 지워나갔다.
발칸반도에 위치한 크로아티아는 국토 면적이 남한 넓이의 절반이 조금 넘는 56,594㎢, 인구는 4백10만여 명으로 유럽에서는 중소규모의 국가다. 19세기 중반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한 크로아티아는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면서 독립한 이래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수립되기도 했다. 크로아티아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면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가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해 주권 국가가 되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유고분쟁,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세르비아 침공, 인종청소 등은 냉전의 종식 이후 본격화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가 가져온 비극적인 사건의 상징어로 기억되고 있다.
그 가운데 유고연방 내 최대 세력인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에 벌어졌던 전쟁은 가장 치열했으며 크로아티아는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인프라 파괴, 난민 발생은 물론 경제의 25%가량이 손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유고 내전의 해결을 위해 ‘유엔(유고)보호군(UN Protection Force, UNPROFOR)’이 개입하고 국제형사재판소가 전쟁의 수행과정에 벌어졌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 심판을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하던 요시프 티토(Josip Broz Tito) 대통령이 1980년에 사망하자 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각 공화국의 지도자들은 권력유지를 위해 민족주의를 자극하면서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연방 내 각 지역 사이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분쟁의 진행과정만큼이나 해결책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키릴과 라틴어의 2개 문자가 존재하고, 가톨릭, 그리스정교, 이슬람의 3가지 종교가 공존하며, 슬로베니아어,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마케도니아어 등 4가지 언어를 사용하면서,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마케도니아인, 몬테네그로인 등 5개 서로 다른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운데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6개 연방으로 이루어져 있는 복잡한 국가였다.
이런 다양한 특성들이 역사적,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경제적 이해로 얽히고 충돌하면서 유고분쟁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는 역사적 민족적으로 과거부터 견원지간의 관계에 있었던 까닭에 1991.3.31.~1995.11.12일 사이에 벌어진 양 진영의 전쟁은 그 참혹함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참화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모두를 합쳐 사망자만 2만여 명이 넘었고, 국민들은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을 온전히 떠안으며 오랜 기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이번에 크로아티아를 들러보면서 수많은 건물들에 총탄과 포탄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전쟁으로 인해 쓰러져간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희생을 기리는 비석과 묘비들, 기념탑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전쟁이 종식되고 전쟁보다 더 길고 힘든 복구 과정 속에 크로아티아 국민들은 러시아 월드컵 경기에서 선전하는 젊은 선수들의 투지에 큰 감동을 받았다.
결승전 전반 18분 만에 프랑스에 자살골로 첫 골을 헌납한 만추키치는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지만 4:1로 뒤져 있던 가운데서도 마침내 후반 24분에 필사적으로 골을 얻어내는 투지를 보여주면서 크로아티아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물해 주었다.
비록 경기는 패배로 끝났지만 고국으로 귀국한 선수들을 국민들은 열렬히 환호했고 선수들의 투지는 크로아티아 국민들에게 다시 재건을 위해 땀을 흘리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에 이웃한 슬로베니아에서는 과거에 이렇듯 복잡한 배경을 가졌던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한 티토 대통령의 별장을 찾아보았다. 지금은 호텔로 변해 있었다. 그는 이 별장에서 호수면 100m 높이의 절벽 위에 세워진 ‘블레드 성(Bled Castle)’과 아름다운 블레드 호수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슬로베니아를 떠나 버스로 한참을 달려 크로아티아의 한적한 시골지역인 트릴(Trilj)을 방문한 지난주 어느 날 새벽, 숙소 밖 동네에서 일찍부터 장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장닭은 긴 호흡으로 한동안 울어대며 고요하던 주변을 깨웠다.
장닭의 외침은 마을 사람들에게 더 부지런해야 한다는 울림 같기도 하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분주한 건강함이 전쟁을 극복하고 근면 속에 발전을 이루려는 크로아티아의 소리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넓고 푸른 평야와 그리 높지 않은 구릉과 산들, 그리고 예로부터 ‘아드리아 해의 진주’로 불리면서 1990년대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유럽 곳곳에서 많은 학자와 시민들이 달려와 인간방패로 도시를 둘러싸고 지키면서 도시를 온전하게 유지하게 된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잔잔하면서도 눈부신 아드리아 해를 품고 있는 항구도시로 궁전과 고대 유적 등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 ‘스플리트(Split).’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진, 수많은 폭포로 연결되는 16개의 호수로 유명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Plitvice Lakes National Park)’ 등 크로아티아 곳곳을 찾아보며 순박하고 근면한 국민들의 모습을 보았다.
우연히 듣게 된, 가슴 깊은 곳에서 마음을 울리는 크로아티아 국가의 곡조와 가사가 소박하고 아름다운 국토와 이곳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드컵 결승전을 마치고 귀국하는 선수들을 환영하며 수도 자그레브시의 연도에 도열하던 크로아티아 국민들은 이 국가를 목이 터져라 외쳤을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조국,
두려움이 없고, 공손하리.
조상들의 옛 영광아,
영원히 기뻐하여라.
그대여, 당신은 우리의 유일한 영광,
그대여, 당신은 우리의 유일한 것이니,
조국이여, 당신이 있는 곳에 들판이 있고,
조국이여, 당신이 있는 곳에 산이 있네.
ps : 유고슬라비아 분쟁의 위기는 1989년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냉전이 끝나가며 점차 몰락하고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본격화되었다. 특히,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은 1991년 걸프 전쟁으로 미국과 전 세계가 이라크에 주목하고, 갑작스러운 유가상승으로 인해 세계 경제 성장이 둔화되던 시기에 발생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분쟁의 중재자를 찾지 못하면서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크로아티아는 2013년 7월 1일 유럽연합(EU)의 28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