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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Jul 10. 2023

프라하 몰다우 강이 전해준 말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버나드 쇼(B. Shaw)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만약 유럽합중국이 생긴다면 누가 유럽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쇼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고 한다.


단연코 마사리크!!

 

역사가 시작된 이래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전쟁을 경험한 유럽에서 통합과 협력을 통해 유럽을 ‘평화의 대지(大地)’로 만들자는 염원은 대부분 국가에서 시민들이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었다. 그런 희망을 실현할 인물로 버나드 쇼는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의 아버지인 마사리크가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이름인 마사리크(Tomáš Garrigue Masaryk)’는 누구인가?


그는 1850년 3월 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호도닌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철학자, 교육학자, 언론인으로 프라하 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던 인물이다. 



마사리크는 당시에 불가능하게 보였던 체코의 독립을 이루어낸 민족의 영웅이자 체코슬로바키아 첫 번째 대통령으로(1918~1935),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 체코슬로바키아를 중앙 유럽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 ‘민주주의의 섬’이라고 불리게 했던 인물이다. 


그는 보헤미아(체코의 오래전 이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의 종교개혁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발견하였고 이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체코슬로바키아를 건국하였으며 체코 민족과 국가의 방향성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지금까지도 그는 400여 년간 이어진 외세의 지배를 끝내고 국가를 세운 인물이자 미래를 제시하고 체코식 민주주의의 원형을 제시한 국부(國父)로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한때 체코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마사리크를 부르주아 정치인의 전형적 인물이자 서방 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 폄하하기도 하였으나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에는 그의 위상과 국가와 민족에 끼친 영향을 부정할 수 없었던 까닭에 그를 사회주의자로 평가하며 공산정권과 연결시키려 애쓰기도 했다.


마사리크는 평생을 두고 ‘체코민족이 이미 15세기부터 민주주의와 휴머니티를 실천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왜 지금에 와서 민주주의와 휴머니티가 사라지고, 인간성의 상실, 권력에 대한 무의식적인 순응,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요약되는 민족의 침체상태를 겪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현실정치를 통해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스탈린 사망 이후 후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을 계기로 촉발된 동유럽 국가들의 탈 소련 바람은 폴란드와 헝가리를 거쳐 체코에까지 불어 닥쳤다. 체코에서는 1968년 공산당 내 개방적인 '개혁파'에 속하는 알렉산데르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가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직업 선택과 거주의 자유, 정치 비판의 자유 등 사회주의를 위한 급진적인 정책을 실시하려고 시도했다. 


체코의 개혁 바람이 다른 동유럽 국가로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던 소련 정부는 1968년 8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를 탱크를 앞세우고 무력 진압했다. 소련군이 주축이 되고 헝가리, 폴란드, 불가리아 등 소련의 위성국 4개국 병력을 포함한 약 25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침공으로 인해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은 피로 물들었고 자유화 개혁 운동이 중단되면서 두브체크를 포함해 개혁파 지도자들은 소련으로 압송되었고 시위는 금지되었다.

 


프라하의 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정치적 사건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 역사로 기록되는데 어느 역사학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소련의 무자비한 체코 침공은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서유럽에서도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소련 비판으로 돌아서는 구실을 제공했다. 역사학자들은 소련의 체코 침공으로 “동유럽에서 공산주의가 사망을 고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용어인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Socialism with a human face)"는 1968년 당시 체코의 지도자 두브체크가 최초로 사용한 용어이다. 원래 의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파 공산당원들이 주장한 민주적, 자유적,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말하며, 넓은 의미로는 권위주의적인 소련식 사회주의와는 이질적으로 반대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체코에서 두브체크가 추진하려고 했던 이러한 개혁은 다른 사회주의권에도 영향을 미쳐 훗날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글라스노스트 정책과 중국의 민주화 운동 등 민주사회주의 운동이나 개혁을 지칭하는데도 인용되었으며 1989년 동유럽 혁명 이후 개혁파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특히 소련에서는 1989년 11월 26일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프라우다지 논설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무력 진압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소련 내부에서도 재평가 받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사회주의를 보다 더 민주적으로 바꾸려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개혁은 당시 스탈린주의로 대표되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현실사회주의를 개혁하려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현실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던 서구 지식인들에게 여러모로 큰 인상을 주었다. 


이후 서구 좌파는 정치적으로 소련식 사회주의를 벗어나 티토주의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유럽공산주의3의 길 등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프라하의 봄이 좌절되면서 두브체크의 뒤를 이어 집권한 ‘구스타프 후사크(Gustáv Husák)’는 두브체크의 모든 개혁을 무효로 돌렸고,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까지 점령 상태가 된다. 후사크는 두브체크의 개혁을 뒤집고, 공산당 내 개혁적인 당원들을 숙청하였으며, 정치적 변화에 대해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을 공직에서 모두 쫓아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산업 분야에서만큼은 상당한 자유가 인정되었는데 그는 경제를 다시 중앙 집중화하였다. 언론에서도 정치에 대한 논평은 다시 불허되었으며, "충분한 정치적 신뢰"가 없는 사람은 누구도 정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체코는 다시 과거로 회귀했다. 그의 개혁 정책 가운데 유일하게 유지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연방화로, 국가는 1969년에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1936.10.5.~2011.12.18)은 체코의 극작가로, 유명한 ‘77헌장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이끈 주요 인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프라하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48년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노동을 하면서 성장했다. 그러나 노력 끝에 프라하 예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에 극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소련은 프라하를 침공하면서 비판적인 작가들에 대한 탄압을 가하게 되는데, 하벨은 이에 저항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하벨은 당시 대통령이던 후사크에게 민주화를 요구하는 공개편지를 보내기도 하였고, 끊임없이 위협과 투옥을 당하면서도 반체제활동을 이어갔다. 


하벨은 1977년 1월 얀 파토츠카, 이르시 하예크 등 241명의 지식인들과 함께 체코의 민주화와 인권존중을 요구하는 내용의 지하선언문인 ‘77헌장’을 기초해 발표한다. 하벨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후 그는 체코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10여 년이 지나 1988년 소련의 개혁적인 지도자 고르바초프에 의한 개혁바람이 동유럽 전역에 불어 닥치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좌절되었던 프라하의 봄기운은 21년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된다. 


1989년 11월 17일 금요일, 폭동 진압 경찰이 프라하에서 일어난 평화적인 학생 시위를 억압하였다. 이 사건으로 훗날 벨벳 혁명(Velvet Revolution)’으로 이름이 붙은 시민들의 격렬한 시위가 11월 19일부터 12월 29일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11월 20일에는 프라하에 운집한 평화 시위자의 수가 전날 200,000여 명에서 500,000여 명으로 두 배 이상 불어나게 되었고, 11월 27일에는 사실상 프라하 시민 대부분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결행한다. 


비록 소련의 지원을 얻은 공산당의 통치가 계속되고는 있었지만 냉전의 해빙 분위기는 동유럽 국가들로 확산하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비폭력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체코의 민주화를 일컫는 이 말은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유래됐다. 그 결과 공산주의 정권은 마침내 굴복하며 무너지게 되었으며, 1989년 12월 29일 공산주의 연방 의회는 하벨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1990년 6월에는 1946년 이래 처음으로 민주적인 선거를 치렀다. 하벨의 대통령 선출은 40년 만에 비공산주의자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 되는 순간이었다. 


프라하에서 일어난 벨벳 혁명은 정치학자나 역사가들에 의해 중앙유럽의 민주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고르바초프는 1987년 자신의 개혁 개방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가 두브체크가 제시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였다. 한 세기에 걸쳐 체코는 이렇듯 힘든 여정을 겪고 민주화 국가로 성장했다.




프라하를 방문했을 때는 막 여름이 시작되려는 시기로 간간이 비가 내리지만 날씨는 따뜻했고 도시 주변은 푸르름이 가득했다. 초여름의 날씨 속에서 34년 전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프라하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삼엄한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한세대만큼의 시간이 흐른 지금 프라하 시내를 산책하면서 느끼는 이 자유로움의 가치를 그 당시의 희생을 기억하며 차분히 만끽했다. 


수도 프라하를 품고 있으며 체코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보헤미아의 구시가 광장에서 천문 시계탑으로 유명한 舊시청사를 지나 100여 미터를 걸어가면 좁은 골목길 양쪽에 레스토랑과 예쁘게 단장한 카페, 옛날 분위기가 풍기는 펍(pub)과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들이 촘촘히 자리 잡고 있다. 



그 길을 빠져나오면 프라하 신시가지로 연결되면서 긴 광장이 멀리 국립중앙박물관을 바라보며 직사각형으로 눈앞에 길게 펼쳐진다. 박물관 앞에는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4명의 체코 수호성인 동상에 둘러싸여 광장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오래전 공산주의의 탄압에 항거하며 수십만 체코 시민들이 몰려나와 피를 흘리며 체코의 독립과 민주화를 요구하던 곳이다. 


광장 주변의 카페에 앉아 목 넘김이 부드러운 깊은 맛과 향기로 유명한 체코 맥주를 마시고 있노라면 자유를 만끽하며 초여름 밤을 즐기고 있는 오래전 민주화를 외쳤던 보헤미아의 중장년 세대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그들은 오래전 자신들의 희생을 훈장처럼 달고 평생을 특권 세력이나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지 않으며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로 이방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카를교 아래를 잔잔히 흐르는 ‘몰다우(체코어로는 블타바, Vltava)’ 강의 물처럼 역사의 한 순간에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을 과거 찬란했던 보헤미아 왕국의 후손이자 시민으로서 당연히 했다는 표정이다. 그들의 표정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특권의식에 빠져 스스로 거짓과 불공정을 일삼으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는 집단의 교만과 위선적 행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카를교를 걸으며 성인들의 조각상 앞에서 또 강변과 도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 궁전의 모습이 지는 해와 다가온 어둠이 섞인 노을을 배경으로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카를교에서


카를교 입구에서 들려오는 버스커의 연주소리와 몰다우 강이 잔잔히 들려주는 보헤미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12시간의 먼 비행거리를 달려온 보람을 초여름 프라하에서 느끼고 있다.





PS : 체코 시민들에게 마사리크와 두브체크, 그리고 하벨과 구스타프 후사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마사리크는 국부로 평가받았고, 두브체크는 하벨이 집권한 이후 연방의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서거하기 전까지 분리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합병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하벨은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지식인의 표상으로서 여러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된 바 있으며 이 같은 공로로 간디 평화상에 이어 2004년 제7회 서울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서거한 뒤인 2012년에 프라하 루지네 국제공항이 그의 이름을 본떠서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으로 개칭되었다.


보헤미안 왕국(체코)의 대표적인 작곡가 스메타나(Smetana)의 관현악 곡 ‘나의 조국’ 중 제2곡 ‘몰다우(Vltava, Die Moldau)’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체코를 상징하는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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