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llo Mar 22. 2024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글 제목에서 인용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곡은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9년 시대를 저항하는 대중예술의 아이콘이던 신중현이 작사 작곡한 것으로 당시에 신인이던 앳된 얼굴의 김추자는 3분 41초 길이의 이 노래가 히트를 치면서 하루아침에 유명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말썽 많은 김 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 상사

동네 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 잔치하네

폼을 내는 김 상사 돌아온 김 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믿음직한 김 상사 돌아온 김 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가사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 갔다가 수많은 전투 속에서 공을 세우고 훈장을 달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김 상사를 온 동네가 환영한다는 내용이다. 



지금은 영어식 표기인 베트남(Vietnam)으로 알려진 국가의 이름을 과거에 우리는 한자표기인 월남(越南)이라고 불렀다.


오랜 기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1964~1975)이 종식되고 10여 년이 지난 후에 ‘도이모이(Doi Moi)’로 알려진 획기적인 개혁개방 정책의 성공으로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도이모이는 베트남어로 ‘변경’을 의미하는 ‘도이(doi)’와 ‘새롭게’라는 의미의 ‘모이(moi)’가 합쳐진 용어로 일반적으로 ‘쇄신’을 뜻한다. 


이 개념은 1986년 12월 베트남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제기된 개혁과 개방 정책을 나타내는 슬로건으로 공산당의 일당 지배체제 속에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접목을 통해 사회주의적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중국의 등소평이 강조한 ‘시장사회주의’나 러시아의 고르바초프가 주장한 ‘페레스트로이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베트남은 월남전 기간 한국군이 미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하면서 한때 우리와는 적국이었으나 개혁개방 이후 지금은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로 부상하였고 호찌민, 하노이, 다낭, 나트랑과 달랏은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최근에는 한국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베트남 여성이 급증하면서 한국의 사돈국가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 



예비역 육군 병장 이**.

우리나라는 미국과 공산 월맹 사이에 전세가 고조되는 가운데 1964년 9월 11일 의무중대 및 태권도 교관단 파견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 그리고 백마부대가 추가로 투입되어 치열한 전투를 했다. 그는 우리 군이 참전한 8년 기간(1965~1973) 동안 파병된 총 31만 2천853명의 군인 중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 속에서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온 월남전 참전 용사 중 한 명이다.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가 고향인 그가 막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월남전에 참전하게 된 동기는 또래의 다른 군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당시 탄광촌이던 고향에서 부친이 대한석탄공사가 관리하는 탄광의 발파계장을 하던 덕분에 나름 유복한 어린 시절에 대한 잔잔한 기억이 있다. 그의 고향마을은 탄광으로 인해 당시만 해도 부와 풍요가 넘치던 곳으로 서울에서 떨어진 오지이긴 했지만 구하지 못할 물건이 없을 정도로 넉넉한 곳이었다. 동네의 번화가는 한편으로는 일명 ‘해병대 골목’이라 불릴 정도로 요란했는데 신원조회가 없는 광부 일을 하기 위해 전국에서 전과자, 불량배와 말썽꾼이 몰려든 집합소로 술만 마시면 동료들 간에도 싸움이 일상이던 곳이기도 했다. 


당시 고향의 국민학교는 전교생이 3,000명에 이를 정도로 큰 지역이었는데 부친의 안정된 직장 덕분에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10세가 되던 해에 부친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장남인 자신 외에도 세 살과 한 살이던 두 동생을 남겨둔 채였다. 결국 그가 12세가 되던 해에 모친이 3남매를 데리고 재혼하면서 거칠던 계부와의 동거는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을 앗아가 버렸다. 그가 고향에서 겨우 학업을 마치고 군에 입대할 무렵에 그 당시는 어딘지도 잘 알지 못하는 월남에서 미국과 공산 월맹군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군대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 먹고 입고 자는 것 모두가 열악해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에 입대한 병사들은 병영 내에서도 늘 춥고 배가 고프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부대 내에서 폭력이 일상이던 시절이어서 그도 고참 내무반장으로부터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였다. 그런 가운데 ‘월남에 가면 배부르게 먹고 월급도 넉넉히 준다더라.’라는 소문이 금세 젊은 군인들 사이로 퍼졌고 배부르게 먹고 돈도 모을 수 있다는 유혹은 20대 초반의 청춘들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미래에 벌어질 막연한 의혹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그는 태권사단으로 잘 알려진 의정부 26사단에서 복무 중 갓 일등병으로 진급한 직후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어린 동생들에게 돈을 벌어 선물을 사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눈물을 뿌리는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고국을 떠났다.


월남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참전용사들은 1970년 7월 29일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될 무렵에 부산에서 출항하는 배에 올랐다. 그는 월남으로 향하는 배안에서 백마부대 29연대로 배속된다는 특명을 받았다. 그나마 ‘전투부대’로 커다란 인명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28연대보다는 ‘경계부대’로 알려진 29연대에 배속된 사실에 안도했다. 배안에서도 소위 ‘선상통신(船上通信)’이 횡행하면서 그나마 덜 위험한 지역이나 부대에 대한 소문이 있어서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나마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배를 탄 젊은 병사들은 한 달여의 바닷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들 대부분이 태어나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외진 산허리 부근에 자리 잡고 있던 부대에서 복무를 하다가 배를 탄 경우이니 그처럼 큰 배를 타보는 경험도 나라를 떠나 해외로 가는 일도 처음 겪는 터였다. 그들은 하루하루 긴장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판단이 가족과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는 심정으로 길고 긴 항해 길을 기꺼이 견뎠다. 


한 달여 기간 바다 위로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운 한낮과 하늘에서 별이 무수히 쏟아지는 밤을 보낸 후 그들은 마침내 낯선 이국땅 해안가에 은밀히 도착했다. 반기는 사람 하나 없는 깜깜하고 적막한 모랫길이 끝이 없이 펼쳐진 해안의 부두였다. 그곳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지명인 흔히 베트남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나트랑(Nha Trang)’이다. 


같은 지역의 이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세월의 흐름만큼 무상하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배에서 내린 후 군용 트럭을 타고 어둠을 뚫고 한참을 달려 배속지인 ‘투이호아(Tui Hoa)’라는 지역에 투입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24개월 동안 생사를 오가며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수많은 잔인하고 힘든 전투를 치렀다.



그는 전투에 투입되기 전날 혹시 모를 최악의 경우를 놓고 늘 의식처럼 행했던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낼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 사진과 간단한 편지를 남기던 행위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고향의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음식을 그리워하며 고급진 미군의 전투식량인 ‘씨레이션(Combat Ration)’이 입에 맞지를 않아 늘 자신에게 얌전히 건네주던 동료 병사가 전투 중 바로 자신의 옆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모습도 가끔 꿈속에 나타난다. 자신의 전공을 내세우기 위해 사병의 전투 공로를 가져간 욕심 많은 지휘관 이름도 여전히 기억한다. 


미군이 6·25 전쟁 당시 중국의 인해전술을 경험한 후 개발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최초로 사용했던 살상 산탄 지뢰인 클레이모어(Claymore Mine, 흔히 크레모아로 부름)의 오작동으로 적군과 아군 가릴 것 없이 엄청난 인명손실의 현장을 수습하던 장면을 상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린다. 부비트랩(Booby Trap)을 밟고 졸지에 다리를 잃은 전우들의 절규를, 작전 중 대전차 지뢰를 밟아 차량이 폭사하면서 아군병사 대부분이 전멸하던 상황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월남에서 만 24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귀국한 후에 군에서 3개월을 더 복무하고 제대했다. 무사히 귀국한 그에게 고향 풍경은 낯설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어린 시절 냇가에서 멱을 감거나 들판에서 뛰놀던 또래 친구들 대부분은 고향에 머물지 않고 서울로 떠났다. 고향마을의 집들도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밥을 지을 때 으레 저녁이면 굴뚝에서 연기가 나던 모습도 사라져 버렸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멀리 신작로 길에서 갈라지던 이웃마을의 모습도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개울을 건너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던 어른들 보폭만큼 넉넉하게 떨어져 있던 돌들은 사라지고 냇가에는 단단한 콘크리트 다리가 올라서 있었다. 다시 돌아온 고향은 베트남 정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이국의 살풍경 속에서 느끼던 ‘휑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8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그는 지금도 멀리 월남까지 찾아와 노래로 자신들을 위로해 준 ‘김세레나’라는 가수가 고맙다고 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고향을 느끼고, 어머니를 생각하였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막내 여동생의 간절한 기도가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1972년 귀국 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베트남을 방문하지 않았다. 작전 중 피아 구분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죄 없는 양민과 농민을 죽음으로 몰수밖에 없던 상황이 죄스러운 게 이유라고 했다. 그렇지만 적국의 군인인 자신들에게 바나나 잎에 떡을 싸서 조용히 건네준 어머니 같은 베트남 노인의 따뜻한 손길을 지금까지 차마 잊지 못하고 있다. 



“물 있는 곳에 베트콩이 있다”

“먼저 보면 먼저 쏴라”

“졸면 죽는다”

“여자를 멀리하라”


전쟁 기간 내내 무더웠던 더위나 독한 벌레의 위협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며 지냈던 24개월 동안 늘 기억하고 있던 구호는 여전히 머릿속에서 생생하다. 


얼마 전 전방에서 북한의 목함지뢰로 두 다리를 잃은 나라를 지키던 우리 군인들을 조롱하며 희희낙락하던 모 정치인의 발언을 보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젊은 세대에 대한 교육이 잘못되어 있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죄지은 사람이 반드시 죄 값을 받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노병은 소망했다. 그는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고 나가며 먼 이국땅에서 숨진 동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 



전쟁 기간 우리 군인 5,099명의 전사자와 10,962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그는 ‘월남전은 이길 수 없었던 전쟁’이라고 결론지었다. 자신들의 안위를 외세에 맡기면서도 부패하고 태만하던 시민들은 자신을 도와주러 온 미군과 한국군을 상대로 횡포와 만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베트콩에게 굴복했다고 했다. 


그는 ‘월남참전유공자’로 또 ‘고엽제후유의증’으로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어 만 65세가 된 이후부터 한 달에 이십만 원씩을 국가로부터 받으며 지내고 있다. 





(일부 사진은 구글에서 가져옴)

작가의 이전글 정선군 산자락에는 조르바가 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