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맥밀란과 프로퓨모 스캔들
해럴드 맥밀란(Harold Macmillan)은 보수당 출신으로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영국의 총리로 재임했던 인물이다. 맥밀란이 집권하던 시기는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에서 벗어나 경제적 부흥을 이루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제국(Empire)’의 해체와 같은 중대한 지정학적 변화를 겪고 있던 미묘한 시기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맥밀란의 집권 시기는 역사가들에 의해 “풍요의 시대”로 묘사된다. 그가 남긴 "여러분은 이렇게 좋은 시절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You've never had it so good)"라는 유명한 문구는 전후 영국 사회의 번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맥밀란은 연설에서 "부자들의 사치품이 가난한 사람들의 필수품이 되었다(the luxuries of the rich have become the necessities of the poor)"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맥밀란은 전후 영국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고, 풍요의 시대를 지속시키며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맥밀란 시대는 1959년 총선에서의 압도적 승리로 장기 집권으로 가는 탄탄대로를 열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1963년 10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맥밀란 시대의 종막을 알린 사건은 다름 아닌 그의 행정부 핵심 각료가 관여된 스캔들이 계기가 되었다. 1963년 영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스캔들은 정치인 한 사람의 불륜과 거짓말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 파장과 충격은 단순한 정치 스캔들을 넘어 영국 사회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옥스퍼드대 출신의 전통적 엘리트 정치인으로 보수당 내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는 전쟁부 장관 존 프로퓨모(John D. Profumo)는 상류사회의 진입을 꿈꾸던 19세 모델이자 고급 콜걸인 크리스틴 킬러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다.
문제는 그들이 소련 군사정보국(GRU) 정보장교의 신분을 감추고 런던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스파이 활동을 수행해 왔던 유진 이바노프와 삼각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유진 이바노프는 프로퓨모와 킬러와의 관계를 이용해 영국 내각에서 논의되는 핵심 정보 획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는 1963년 의회에서 야당 의원의 질의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는데 프로퓨모의 초기 부인이 거짓 증언으로 밝혀지면서 충격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뚜렷한 증거가 등장하면서 프로퓨모는 사임했지만, 그 여파는 영국 내부는 물론 우방국이던 미국과 유럽공동체 회원국들, 그리고 NATO 회원국들에게 확산되었다.
2. 스캔들의 확산 과정
이 사건은 단순한 스캔들이라기보다는 전후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던 맥밀란 정부를 좌초하게 이끈 재앙이자, 세계적 냉전 구도 속에서 영국의 국제적 위상과 신뢰에 변화를 불러온 사건이었다. 또한 그동안 영국 사회에 잠재해 있던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이 남긴 국내외적 손실은 단순히 단기적 충격에 그치지 않고 영국의 신뢰도와 영향력에 장기적인 손상을 입혔으며, 정치문화와 사회구조, 국제정치와 경제, 국가안보, 대중의 인식 등 다방면에 걸쳐 깊고 오랜 흔적을 남기는 한편 영국의 국제관계 재정립 과정에도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프로퓨모 스캔들은 역사적으로 ‘Anglo-Saxon’이라는 이름하에 가장 강력한 동맹으로 평가받던 영국과 미국 사이의 신뢰도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미국과 영국의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에 균열을 가져왔다. 미국은 영국 정보기관과의 협력, 특히 핵무기 기술 공유(폴라리스 미사일 협정)에 대해 재검토에 들어갔으며 실제로 6개월 이상 관련 협정 논의가 중단되기도 했다. 또한 NATO 내에서 영국과의 정보공유와 보안 역량에 대한 의심이 확산하면서 2년간 NATO 공동 정보 프로젝트 3건이 중단 또는 축소되었으며,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전통적 정보 협력국들도 기밀정보 공유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유럽 내에서 지도력의 상실과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좌절의 결과도 초래했는데,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영국의 EEC 가입 신청을 거부하는 명분으로 영국 정치의 불안정성과 신뢰도 저하를 언급하였다. 프로퓨모 스캔들은 영국이 유럽통합 논의에서 배제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독일 등 유럽 내 다른 국가들 역시 영국을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냉전 구도 속에서 서방 세계의 도덕성과 신뢰의 상징이던 영국은 일대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은 영국 정보기관의 신뢰 상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캔들에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련 군사정보국의 정보장교의 신분을 감추고 런던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해군 무관(Naval Attaché)의 신분으로 스파이 활동을 수행해 왔던 유진 이바노프가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국 정보기관(MI5, MI6)의 보안 관리 능력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소련이 영국 고위 공직자의 사생활을 통해 기밀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국가안보의 근본적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과 동구권은 스캔들을 영국의 도덕적 우월성 주장을 조롱하며 선전과 선동(propaganda)의 좋은 소재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영국의 국제적 이미지와 위신은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영국의 소련에 대한 정보력 신뢰도 하락과 함께 서방 동맹의 결속력 약화 우려가 확산하였으며 자연스럽게 영국의 중재자 역할 축소도 이루어졌다.
3. 미국의 반응 - 신뢰의 동요와 외교정책의 실질적 변화
프로퓨모 스캔들이 터졌을 때 미국 케네디 행정부의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그리고 CIA는 두 가지 측면에서 즉각적이고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하나는 ‘기밀 유출에 따른 정보보안 문제’와 ‘영국 정부의 통제력과 신뢰도’에 대한 우려였다. 미국은 영국의 고위 관료가 소련 정보요원과 간접적으로 연결된 사실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당시 양국은 핵무기 개발과 배치, 첩보활동, 냉전의 전개에 따른 전략 등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핵심 동맹국으로 중대 사안을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은 비밀정보가 소련에 누출될 위험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 CIA와 국방부는 신속하게 영국과의 정보공유 라인을 일시적으로 축소하거나 민감한 정보는 공유하지 않도록 하는 내부 지침을 내렸다. 시간이 흐른 후 비밀이 해제된 미국 측 문서에는 “프로퓨모 스캔들로 인해 영국 정보기관의 신뢰성이 심각하게 훼손됐다”라는 평가가 공식 보고서에 기록된 바 있다.
스캔들이 드러난 이후 영국 정부의 통제능력과 신뢰도에 대한 문제도 심각했는데, 사건이 본격적으로 공개된 이후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맥밀란 정부가 위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미국 대사관과 런던 주재 미군 참모들은 워싱턴에 “맥밀란 행정부의 위신이 크게 추락했다”라는 요지를 담은 분석을 반복적으로 보고했다. 따라서 백악관은 영국의 정치적 혼란이 미국뿐 아니라 NATO 내부의 결속과 서방 동맹의 통합에 악영향을 줄 것임이 분명하다는 우려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스캔들 직후 미국 정부는 영국과의 고급 정보, 특히 핵무기 관련 첩보와 과학기술 자료의 공유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에 따라 당시 케네디 대통령과 맥밀란 총리 간 회담을 통해 진행 중이던 폴라리스(Polaris) 핵미사일 기술 이전 협상은 최소 6개월 이상 연기되었다. 또한 미국 정보기관은 영국의 보안부(MI5)와 비밀정보국(MI6)과의 협력 수준을 한 단계 낮췄고,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5개국 정보기관 공동체인 ‘Five Eyes’ 정보공유 체계 내에서도 영국을 예의주시 대상으로 분류했다. 이와 함께 영국 내 미군기지와 NATO 설비의 보안 점검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영국 내 미국인 외교관, 군인, 첩보요원들에게는 영국 내 접촉자 및 관계망에 대한 엄격한 보고 의무가 새로 부과되었다.
미국과 영국이 긴밀하게 논의 중이던 ‘폴라리스 미사일 배치’ 및 ‘핵우산 제공’ 약속은 재검토 대상이 되었으며, 실제로 영국은 미국의 신뢰 회복을 위해 추가적인 보안 조치와 제도개혁을 약속해야 했다.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는 “핵기술 이전과 관련해서는 영국 정부의 내부 감시와 신뢰도 확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스캔들의 여파로 NATO 내부에서도 핵심 전략회의와 기밀 작전 논의에서 영국 대표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축소되었다. 미국은 프랑스, 서독 등 다른 동맹국과의 양자 협력 라인을 강화하는 한편 영국이 위기를 수습할 때까지 주요 의사결정에서 단지 ‘관찰자’ 역할로 분리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는 “영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비공식 외교 채널을 통해서는 영국 정부에 “신뢰 회복과 보안 강화”를 강하게 요청했다. 영국 주재 미국 대사관과 CIA 런던 지부는 영국 정부에 “이번 사건의 재발 방지책이 없으면 동맹 내 정보공유가 어렵다”라며 경고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같은 미국 주요 언론은 연일 영국 정치의 도덕적 위기와 내부 불안, 정보기관의 실수 등을 상세히 보도하며, “영국은 더 이상 세계의 리더가 아니다”라는 논조의 기사를 잇달아 쏟아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 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나 랜드연구소 등도 영국의 신뢰도에 대한 회복이 없으면 미·영 동맹이 약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4. 미국의 반응이 영국에 남긴 교훈
미 행정부는 영국 정부에 “공직자 윤리 강화, 정보기관 내부 개혁, 보안 프로토콜 개선”을 명확하게 요구했다. 영국 정부는 신속하게 대처했다.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영국은 1964년 공직자 행동강령 제정, 정보기관의 내부 감찰 및 외부 감사제 도입, 고위 관료 신원조사 강화 등 신뢰 회복을 위한 대대적인 제도개혁을 단행해야 했다. 정부는 MI5와 MI6의 내부 심사와 외부 감사 제도를 도입하여 정보기관의 인사·보안 관리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정보기관 예산도 1964년 한 해에 8% 삭감되었으며, 고위직 인사 10여 명이 교체되었다. 또한 공직자, 특히 고위직에 대한 신원조사와 사생활 점검이 대폭 강화되었다. 정기적 윤리교육과 보안 교육, 외부 감시체계도 자리 잡게 되었다. 영국 정부의 이러한 노력은 훗날 영국뿐 아니라 미국과 서유럽 여러 국가의 정보기관 운영에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영국이 이같이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개혁을 실행하고 정치적 안정을 회복함에 따라 미국은 점진적으로 정보공유와 군사협력을 복원했다. 미국과 영국 관계는 1964년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 정권 출범 이후 다시 점진적인 정상화 궤도에 올랐으나 그 과정에서 미국은 언제든 정보공유 축소를 카드로 쓸 수 있음을 명확히 했다. 영국의 존재감이 약화되고 위상이 추락함에 따라 미국은 NATO 내에서 프랑스와 서독 등 다른 동맹국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상대적으로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영국의 위기와 혼란이 동맹 내부에서 미묘한 힘의 이동을 가져온 상황을 계기로 미국 입장에서는 서유럽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 분산과 다원화의 촉진이라는 예상치 않던 부수적 효과를 얻게 된 것이다.
미국이 보인 신속하고 ‘냉정한 거리두기’와 ‘조건부 신뢰’ 전략은 영국이 국제사회에서 신뢰와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 외교 자산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했다. 이후 영국은 외교, 안보, 정보, 공직자 윤리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기준을 의식하며 제도개혁과 신뢰 회복에 매진했다. 결과적으로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영국에서 발생한 프로퓨모 스캔들은 영국 혼자만의 위기가 아니라 동맹 전체의 신뢰 체계와 국제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험대였으며, 미국은 이를 계기로 동맹 간의 신뢰도 유지가 안보는 물론 정보 협력의 핵심 조건임을 명확히 선언함 셈이다.
프로퓨모 스캔들 당시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내정간섭을 자제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영국에 대한 정보협력과 핵기술 이전, 외교적 신뢰의 수준을 대폭 낮추고 사실상 신뢰 회복을 위한 제도개혁을 요구했다. 영국은 이 압력에 따라 정치·정보기관·윤리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했으며, 그 결과 미국과의 관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정상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국제정치 협력, 특히 군사와 안보 정보를 공유하는 동맹국들 사이에서 ‘신뢰’가 얼마나 핵심적인 요소인지를 일깨우는 교훈을 남겼다.
5. 맺음말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트럼프 행정부의 시각과 입장을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남북 간 대치 상태에서 북한은 핵 개발 완성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핵심 조력국이 되어 한반도에서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그런 가운데 대한민국은 여야, 지역, 계층, 세대 간 갈등으로 분열의 시기를 보내며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일부에서 북한 핵에 맞서기 위해 핵무장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분열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각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사회 내부 곳곳에 적국에 약점을 잡혀 포섭대상이 된 프로퓨모와 같은 존재는 없을까. 갈등과 대립, 그리고 충돌이 일상화가 되어버린 오늘의 대한민국의 한가운데에서 오래전 영국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이 주는 교훈을 살펴보면서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