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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운명, 유숩의 꿈

by Hello

튀르키예 최대 도시이자 경제와 문화 중심지인 이스탄불을 벗어나면 넓고, 건조하며 황량한 평야가 펼쳐진다. 간혹 얕은 구릉과 낮은 산들이 보이지만 눈앞에 펼쳐진 대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유럽대륙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적 위치와 그런 이유를 배경으로 지정학적 충돌이 빈번한 까닭에 역사적으로 정치적 불안이 낯설지 않은 상황을 튀르키예 국민은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성된 사고와 인식의 애매함도 튀르키예인들이 갖게 되는 성정이 된다. 이를 통해 동서양 문화가 공존하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독특한 특징이 있지만, 오히려 역사적으로 큰 사건에 휘말리거나 선택을 요구받는 피해를 입은 경우도 빈번히 일어났다. 조르바의 그을린 갈색 피부가 에게해와 지중해의 바닷바람과 햇볕이 조화를 이룬 그리스다운 것이라면 튀르키예 사람들의 짙게 그을린 갈색 피부는 여과 없이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외모는 피부색만큼이나 강해 보였지만 대화를 나눌 때마다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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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런던 시내 기념품점 가판대에서 패러디 사진이 들어간 엽서를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었다. 유럽연합(EU)이라는 건물로 들어가려는 튀르키예인(사진 속에서 튀르키예 국기를 어깨에 두르고 이슬람식 복장을 한 모습을 통해 그 사람이 튀르키예인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이 짐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경비원이 바리케이드를 올려주기를 황망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최초 6개국으로 출범한 유럽연합은 일곱 차례에 걸친 회원국 확대 과정을 거쳐 현재 27개 회원국을 가진 지역 통합기구로 성장했다. 가장 최근인 2013년에는 크로아티아가 새 회원국으로 가입했으며 현재는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과의 가입 협상이 진행 중이다. 튀르키예와의 협상은 20년 전인 2005년 10월에 시작되었지만, 가입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가지 이유로 2016년 12월 이후 EU에 의해 사실상 동결된 상태에 놓여있다. 만일 튀르키예가 EU 시장에 가입하면 튀르키예는 유럽연합이라는 공동체 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요소로 무장한 8,000만 명이 넘는 막강한 인구를 가진 국가로 등장하게 된다. 이는 8,300만여 명의 독일에 이어 인구 규모 면에서 두 번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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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는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유럽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제국의 운영자였다. 그러나 19세기말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영토 확장과 패권전략으로 제국의 쇠퇴를 경험하면서 독일을 통해 군사와 경제 개혁을 기대했는데 독일 또한 오스만을 통해 중동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던 터였다. 결국 튀르키예는 1차 세계대전에서 이슬람 세계의 지지를 이용하려는 독일의 전략에 말려 같은 편에 섰다가 패전 후 오스만제국이 붕괴하면서 영토 대부분이 중동과 발칸지역으로 분할되는 참사를 경험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물론 인종, 종교, 그리고 문화적 이유로 튀르키예는 대부분 유럽 국가에 낯설고 불편한 이미지를 가진 국가로 남아있다. 실제로 튀르키예는 기존 유럽연합 회원국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가치와 유산이랄 수 있는 요소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이질적인 면이 강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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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는 신입 회원국이 가입을 신청할 때 가입 여부를 판단할 몇 가지 표준을 세워두고 있다. 그것을 기준으로 민주주의 가치의 존중, 법치주의 준수, 인간의 기본권 존중, 기본적 삶을 위한 경제 수준, 그리고 회원국 간에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는 이질적 요소들에 대한 분규 가능성 등을 까다롭게 심사한다. 여기에다 심사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유럽이 범기독교 문화권이라는 종교적 기준과 사실상 백인 중심 사회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보편적 특징도 간과하기 어렵다. 튀르키예는 역사적으로 이런 특징과 거리가 먼 국가였다. 따라서 오랜 기간을 두고 진행된 튀르키예의 유럽공동체 가입 거부는 기존 회원국들이 이런 생경함을 아직은 견뎌낼 자신이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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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는 6·25 전쟁 파병을 계기로 우리와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 나라다. 튀르키예 정부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연인원 2만 명 이상을 파병하였고, 그중 1,0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들은 자국의 열악한 정치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낯선 나라를 지키기 위해 8,000km를 날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과거 영광의 흔적이 곳곳에 부서진 채로 존재하는 이 국가는 어떤 이유로 우리를 도우려 했을까. 현실적으로는 NATO 가입 등 국익 극대화를 위한 튀르키예 정부의 안보 전략 배경을 지적하곤 하지만, 멀리 낯선 땅에서 피 흘리며 싸운 튀르키예 청년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은 잊을 수 없다.


영화 ‘아일라(Ayla)’는 2017년 10월 27일에 튀르키예에서 개봉된 작품으로 튀르키예 디지털 하우스 프로덕션이 직접 제작에 착수하여 자국에서 영화 개봉 사상 역대 5위의 대흥행을 기록한 유명한 작품이다. 영화는 관객 수 5천3백여만 명을 돌파하며 최고점을 찍은 후 튀르키예 영화사상 전체 관객 수 6위에도 오른 바 있다. 영화는 6.25 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군 부사관인 슐레이만 딜빌리이 육군 하사와 전쟁고아가 된 한국 소녀 아일라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6.25 전쟁에서 슐레이만과 아일라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60년 후 슐레이만이 아일라를 찾아 마침내 상봉에 성공하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를 통해 전쟁 당시 전투 상황과 튀르키예군의 활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튀르키예에서의 지속적인 관심에 비해 국내에서는 상영 이후 5만 명에 못 미치는 관객 수를 기록하며 상대적으로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도움을 준 이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데 반해 도움을 받은 우리의 무관심한 세태는 아쉽다고 하겠다. 튀르키예인들에게는 이처럼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심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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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려 깊은 모습은 다른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카라반 사라이(Caravanserai)

그들은 오래전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들과 낙타를 위한 쉼터를 그렇게 불렀다. 잿빛 모래가 뜨거운 바람의 힘으로 무심히 흩날리는 넓고 광활한 사막과 광야에 약 40여 km 거리를 두고 만들어 오가는 행렬을 위로했다고 한다. 오래전 존재했던 극한의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인간의 지혜이자 사려 깊은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카라반 사라이는 지역마다 크기와 넓이가 다른데 단순히 숙소를 넘어 상인들이 머물며 물건을 사고팔고 정보를 교환하는 중요한 상업과 문화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지역의 문화와 전통이 어우러지는 공간의 역할도 수행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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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인들은 자신의 모국을 ‘박물관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유적지를 안내하던 ‘오스칸’이라는 50대 중반의 현지인을 만났다.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강렬한 햇볕과 바람에 그을렸지만, 유머가 뛰어나고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이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십 수 년 동안 관광 안내 일을 하면서 튀르키예의 유명지역 45곳을 방문하였고 300여 곳의 성곽, 유적지, 박물관, 교회, 성당, 동굴, 도서관 등을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고 고개를 저었다. 튀르키예 전국 각지에 놓여있는 유적지들을 둘러보며 그럴 수 있겠다고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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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은 고대에는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 문명의 중심지로 특히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지역은 다양한 고대 왕국들이 부침을 거듭한 무대였으며, 이후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중심지가 된 지역이다. 13세기말에 튀르크계 부족장 오스만 1세가 세운 오스만제국(1299~1922)은 한때 동유럽, 북아프리카, 중동까지 확장하면서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1453년에는 ‘제2의 로마’로 불리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며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후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꾼 후 20세기 초반까지 제국을 운영해 왔다. 콘스탄티노플 정복과 술레이만 대제 시대의 유럽 진출은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유럽 문명사에 근본적 변화를 불러온 사건이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제국이 몰락하였고, 오늘날까지 튀르키예인들의 존경을 받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주도한 독립전쟁을 통해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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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유럽, 아시아와 중동을 잇는 교역과 에너지 수송의 요충지로서 오랜 기간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동서양 문명의 교량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인플레이션, 통화 가치 하락, 청년 실업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시리아 내전, 쿠르드족 문제, 그리스와의 긴장 등 다양한 지역 갈등에도 얽혀있어 외교적으로 복잡한 처지에 놓여있다. 다른 중동 국가들과는 달리 튀르키예는 대통령제를 운용하고 있는데 에르도안 대통령이 2003년 총리로 집권한 이후 20년 넘게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에르도안 정부는 초기에는 경제 성장을 이끌었지만, 최근에는 권위주의적 통치와 언론 탄압, 인권 문제 등으로 유럽은 물론 국제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는 NATO 회원국이며, 오랜 기간 EU 가입 후보국이지만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이유로 가입은 지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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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토인비(A. J. Toynbee)는 오랜 연구와 깊은 사고 후에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산물이라고 정의하였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척박하고 험난한 지리적, 지정학적 요소들에 맞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시대와 제국을 개척한 국가들이 승리의 역사를 기록하곤 했다. 비록 한여름이라곤 하지만 견디기 힘든 뜨거운 바람이 따가운 햇볕과 어우러져서 거리와 광야와 골짜기를 오가는 이방인들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이런 척박한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고 오랜 기간 아시아, 아프리카와 유럽의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했을까. 고대에는 풍요로운 도시였지만 이제는 부서진 교회와 마을의 흔적만을 간직한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에베소(Ephesus),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하고 사도 빌립이 순교한 장소로 유명한 파묵칼레(Pamukkale), 로마의 박해를 피해 초기 기독교인들이 동굴과 지하도시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한 카파도키아(Kapadokya), 그리고 성 요한과 마리아 전설이 관련된 곳으로 유명한 쉬린제(Sirince) 지역의 현재 모습이 오스만제국 흥망의 교훈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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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유숩(Yusuf)을 처음 만나던 날 그는 함박웃음을 띄며 20미터쯤을 뛰어 내게 다가왔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 다른 대학 축구클럽의 학생들과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경기를 앞두고 운동장에서 각자 몸을 풀다가 눈이 마주친 것이다. 검은색의 곱술 머리칼에 나이에 비해 코밑은 물론 턱수염이 풍성한 그는 묵직하고 큰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처음에 유숩이라는 그의 이름이 낯설어 나는 중동 사람들에게만 있는 고유한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성경에 나오는 야곱(Jacob)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로 시기심이 많던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이집트로 갔던 요셉(Joseph)이라는 이름의 터키식 발음이었다. 요셉은 비록 노예 신분이었지만 뛰어난 외모로 인기가 많아 그를 몰래 엿보던 이집트 여자들이 정신이 혼미해져서 요리하다가 손을 베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하는데, 내가 만난 유숩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잘생긴 데다 영어도 뛰어나고 미소까지 빼어나서 고향에서 또래 여성들 사이에 꽤 인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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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서 처음 만난 이후 우리는 비록 전공은 달랐지만, 특별히 가깝게 지내게 되었는데 내게는 무엇보다 튀르키예의 6·25 참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빼놓지 않았는데 유숩의 선대 친척 중에서 6·25 전쟁에 참전한 분이 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로 영국은 물론 유럽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대학의 캠퍼스에서 사실상 주류가 되지 못했던 동병상련의 감정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당시만 해도 동양에서 온 필자나 튀르키예에서 온 유숩은 모임에서 서구사회의 관습이나 백인 혹은 유럽인이라는 동질성이라는 면에서 거리가 먼 이방인이었고, 따라서 교내 행사나 축제는 물론 심지어 운동장에서 경기할 때도 소외감을 느끼는 순간이 낯설지 않았다. 초기에 필자는 오른쪽 윙플레이어였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내내 공을 잡아보지 못할 정도로 패스가 전달되지 않아 그들만의 플레이에 허탈해한 적이 많았다. 유숩도 비슷한 경험을 고백했는데, 이후 우리는 서로 오른쪽 허리와 오른쪽 공격수로 조합을 이끌어 가며 경기를 하곤 했다. 그 후에도 우리는 캠퍼스 안팎의 다양한 공간에서 드문 경우였지만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공유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다름’이 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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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숩은 대학원 과정을 마치면 국제기구에서 일을 하거나 외교관이 되어 국익을 다투는 외교 현장에서 조국 튀르키예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을 하기를 희망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와는 6·25 전쟁의 경험을 공유하고 제국을 이루었던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며 모국의 미래를 향해 어디에선가 정진하고 있을 유숩의 노력이 성과로 드러나기를 기원했다. 젊은 시절 낯설고 말 설은 캠퍼스에서 체험한 이방인으로서의 씁쓸한 경험이 여전히 그의 조국 튀르키예를 유럽이라는 성(城) 바깥에 세워둔 채 지속되고 있지만, 과거 제국을 호령하던 제국의 후손답게 튀르키예의 밝은 미래를 건설하는데 유숩과 그의 동료들이 헌신을 다하고 있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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