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영웅, 이회택

by Hello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꿈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았다.

대학생이 되고 싶은 청년의 꿈, 힘든 일일망정 아침마다 직장에 출근하고 싶은 젊은이의 꿈, 가정을 이루고 싶은 소시민의 꿈, 아이들에게 세끼 밥을 굶기지 않고 먹이고 싶은 가장의 꿈.


일상에서 자신의 소박한 꿈이 좌절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해 주고 말없이 격려해 주는 누군가가 주변에 있기를 갈망했다. 그 시대에 다행스럽게도 그런 인물들이 있었다. 문화와 예술분야에서 그것이 두드러졌다. 음악계에서는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트리오의 활약이 있었다. 스포츠분야에서는 레슬링의 김일이, 권투에서는 김기수와 홍수환 선수가 있었다. 축구선수 이회택도 그중의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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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국민들은 그를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단지 성취의 결과만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가 순탄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묵묵히 자신이 꿈꾸던 길을 가면서 국민을 위로해 주었고, 또 마침내 꿈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하던 국민들은 그가 자신들 못지않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우뚝 선 것에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는 4살 때 북한으로 월북한 아버지와 생이별을 했다. 월북자의 처(妻)라는 주홍글씨를 견디지 못한 어머니도 그의 곁을 떠났다. 아이는 할머니와 살았다. 할머니는 ‘거친’ 환경 속에서 자식을 그리워하는 속울음을 하는 가운데서도 외톨이가 된 어린 손주를 굶기지 않으려고 모진 고생을 했다. 그는 고향 김포의 논밭에서 동네 아이들과 돼지 오줌보, 짚으로 엮은 모양도 제대로 안 나는 공을 차며 꿈을 키웠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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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고향인 김포 양촌면에서 열린 리 대항 축구대회에서 생전 처음 유니폼을 입은 진짜 선수들 경기를 보면서 서울로 가서 축구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변변치 못한 환경 속에서 이 학교 저 학교를 옮겨 다니다 마침내 동북고등학교에서 평생 은인이 될 스승을 만났고 그로부터 체계적으로 축구를 배웠다.


그리곤 선수로 한양대, 석탄공사, 양지축구팀, 포항제철, 국가대표팀과, 또 감독으로는 한양대, 포항제철 아톰스, 전남 드래곤즈를 거치며 평생 축구인생을 살았다. 그의 축구인생은 한국 축구의 역사와 기록이 되었다. 그런 여정 속에서 서구 팀들과의 경기를 통해 한국 축구가 더 발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했다. 그의 시대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던 까닭에 선진 축구를 제대로 공부하고 체화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회한은 그에게 남아있는 아픈 기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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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남북 축구대회를 위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 4살 때 헤어진 아버지를 40년 만에 만났다. 아버지의 입에서 “미 제국주의 놈들 아래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나는 수령님과 지도자 동지의 은혜로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북한체제의 현실을 몸소 깨달았다. 마침 다음 날이 그의 생일이었는데, 아버지가 손수 입에 넣어주는 생일 떡을 받아먹으며 부자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곤 한국 선수단이 서울로 떠날 때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또 생이별을 했다. 부친은 재회 6년 후인 1996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올해 그의 나이가 여든을 막 넘었으니 짧지 않은 삶 속에서 부친과의 동거는 4년이 겨우 넘을 뿐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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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난해 모 언론과 한국 축구의 현실을 진단하는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젊은 선수들에 대해 몇 마디 충고를 했다. 더 나은 경기력을 기대하며 원로로서 조언을 한 것이다. 기사가 나가자 비난의 화살이 그에게 쏟아졌다. 일부 젊은 축구팬들은 자신의 우상을 비판하는 그를 무능하고 노쇠한 인물로 평가하고 비판했다. 월드컵도 나가보지 못한 구세대 노인이 왜 자신의 우상을 비판하느냐는 것이 핵심을 벗어난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의 유명 언론 매체 축구담당 전문가들은 그가 지적했던 내용을 이미 오래전부터 종종 언급한 바 있었다. 서유럽에서 축구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경험이 없던 그였지만 적어도 축구에 관해서만큼은 선진국 분석가들의 지적에 뒤떨어지지 않는 안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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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비난하는 젊은 세대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이회택은 그를 비판하는 젊은 세대의 부모들을 가슴 뛰게 하고 희망을 준 인물이다. 손홍민의 부친 손정웅 감독도 학생시절 이회택 감독을 보며 빈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축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을 것이다. 어느덧 나이 80세가 넘은 나라의 어른이 손자뻘 선수들을 시샘하고 비난하기 위해 신문에 보도된 그런 발언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터무니없는 비난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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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끼고 사랑하는 젊은 선수들이 더 분발해서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충정 어린 고언을 한 것이다. 그것이 사회의 어른으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그의 시대에는 상상도 못 할 훌륭한 여건 속에서 성장해 세계적인 수준에 있는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선물해 준 조국을 위해 마지막 투혼을 발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난 충언인 것이다. 80세라는 고령이 그의 진심 어린 속내를 표현하는데 서툴렀을 것이고, 인터뷰의 긴 내용을 거두절미하고 보도한 기사도 핵심을 빠뜨린 것이다. 우리가 그의 진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운동장에서 신장이 우월한 서구팀이라면 흔히 주눅이 들법했을 텐데도 단 한순간도 기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용기가 있던 선수였다. 일상의 힘겨움으로 우울하던 국민들은 그런 모습에 열광했다. 선수들 중에서도 단신이었지만 그는 그 시대에 유행했던 동요의 한 구절 “떴다 떴다 이회택 날아라 날아라.”라는 가사처럼 쉴 새 없이 날아다니며 적진을 헤집고 뛰었다. 그는 북한을 방문했을 때 서슬이 퍼런 북한 보위부 직원들에게도 호통을 치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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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곳곳에서 어른을 보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다. 사회와 나라가 바른 길을 가는데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직언을 아끼지 않는 어른들이 눈에 띄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먹고사는 것조차 힘들던 시절, 기개와 뛰어난 경기력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던 그가 꼿꼿하고 올곧은 어른으로 건강하게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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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회 유튜브 채널 ‘코드큐’에서 이회택 감독을 촬영한 동영상이 업로드 이틀 만에 19만회를 기록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 20만회를 넘을 기세다. 댓글도 400개가 넘었다. 이 감독을 촬영한 동영상 중 역대 2위라는 폭발적인 반응이다. 북한을 방문하여 40년 만에 부친과 상봉했던 감동적인 순간과 본인이 경험한 북한의 현실을 담담하게 고백한 것이 배경이 아닐까 한다. 이에 더해 어려운 시절을 살면서 땀과 눈물을 함께 하면서도 좌절과 고통의 순간을 극복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는데 기여한 수많은 소시민들이 자신에게 희망을 던져준 그 시대의 영웅에게 보내는 고마움과 감사의 인사 덕분이 아닐까 싶다).


(사진은 구글에서 가져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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