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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Apr 02. 2023

나라에 어른이 필요한 이유

유학 시절 캠퍼스에서 같이 공부를 하던 영국인 사이먼과 토니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 둘은 서로 많이 달랐다. 출신 학교, 출신 배경, 사회를 보는 인식, 평상시 읽는 신문, 좋아하는 음악, 여행에 대한 취미, 선호하는 음료, 외모 가꾸기, 응원하는 축구팀, 심지어 왕이 존재하는 입헌군주제에 대해서도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차를 마시는 습관도 달랐는데 사이먼이 머그(Mug) 잔에 티백을 넣고 먼저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에 우유를 섞어 마시는 반면에 토니는 티백을 넣고 우유를 조금 넣은 후에 뜨거운 물을 부어야 티(tea) 향이 적절하며 텁텁하지 않고 부드러운 제맛이 난다고 주장했다.


런던 북부 출신인 사이먼(Simon)은 큰 키에 천성적으로 따뜻한 성품을 갖고 태어난 것인지 늘 부드럽고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말도 조용하고 차분하게 하면서 친근감이 있었다. 그는 외국에서 온 이방인 친구들하고도 잘 어울렸는데 주말이면 축구경기도 같이하고 펍(Pub)에서 맥주도 종종 마시면서 영국인의 일상적인 평범한 삶이나 취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는 복수전공으로 음악을 선택하여 첼로를 공부했는데 여학생들이 바퀴가 달린 커다란 악기 가방에 첼로를 넣고 힘들게 끌고 다니는 데 반해 그는 커다란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캠퍼스 안에 있는 음악연주실을 큰 걸음으로 다니곤 했다. 그는 훗날 영연방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대회의장에서 ‘카잘스(Casals)’를 연주해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잉글랜드 북서쪽 항구도시 리버풀에서 온 토니(Tony)는 사이먼과는 반대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토니는 영국은 물론 세상 밖의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그는 교내 축구팀에 가입하여 활동했는데 서로 몸을 부딪치며 땀을 흘리는 축구야말로 사내다운 운동이 아니겠냐며 적극적인 축구 예찬론을 펼쳤다. 


축구선수를 해서 출세를 해도 될 만큼 강한 체력과 뛰어난 자질을 갖춰 프로팀 2군 정도에서 선수로 활동해도 될만한 그였지만 그는 자신의 영국인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졸업 후에는 세계여행을 하며 다양한 나라를 경험한 후에 마음에 끌리는 나라에 정착해서 능력을 발휘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을 꿈꾼다고 말하곤 했다. 


수업 시간에 그들 둘은 국제정치 전공의 학생들답게 영국의 외교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과의 관계는 물론 과거 영국이 통치했던 영연방 국가들에 대한 영국의 외교적 입장을 놓고도 뚜렷한 주관이 있었다. 둘은 특히 영연방 국가 출신으로 영국이라는 섬에서 합법적인 영국민의 자격으로 사는 그들의 후손에 대한 문제에서는 서로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다. 


영국정치에 늘 논란이 되고 있던 주제인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문제에 대해서도 사이먼은 영국도 유럽 국가이니만큼 유럽연합의 회원국으로 남아있는 게 현명한 방법이 될 거라는 입장인 반면에 토니는 영국이 전통적인 영연방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영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었다. 


따라서 수업 시간에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외무성의 유럽과나 식민지부서의 담당자처럼 지식과 상식을 동원한 격렬한 토론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늘 같이 어울렸고 토론했고 학문적으로 또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응원하는 축구팀을 놓고도 그들의 의견은 상이했는데 사이먼이 오래전 조상 적부터 런던 북부를 연고지로 하는 아스날 축구팀을 응원하는 반면에 토니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자기 고향을 연고로 하는 리버풀 축구팀을 응원하였다. 


런던 북부에 위치한 ‘아스날 축구팀(Arsenal Football Club)’은 이름 그대로 오래전 총기와 대포 등을 만드는 공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팀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1891년에 프로클럽이 되고 1914년에는 지금의 명칭인 아스널로 클럽 이름을 확정했지만 이미 1886년에 공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팀을 창단한 역사가 있다. 


전 세계로 진출해서 식민지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그리고 대영제국의 등장에 필수 요소가 되는 군수품을 제작하는 공장 노동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그의 가족들이 전통적으로 아스날 축구팀을 응원하게 되는 마치 신성한 신앙과 같은 것이 된다.





토니의 집안도 항구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오래전 조상 적부터 산업혁명 이후에는 원자재 수입은 물론 제조한 다양한 상품을 수출하거나, 심지어 영국인들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대륙을 향해 떠나는 출발지였던 항구도시인 리버풀(Liverpool)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산업혁명 이전은 물론 그 후에 이르기까지 리버풀 항구만큼 각별한 사연이 넘치는 지역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1699년 최초의 노예선인 리버풀 상선이 아프리카로 출항하면서 본격적으로 노예 거래가 시작되었으며, 불운한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등록된 항구가 바로 리버풀이기도 하다. 1830년에는 리버풀과 맨체스터 간에 사상 최초로 상업철도 노선이 개통되었으며 그 결과로 19세기 한때 리버풀의 경제력은 수도 런던을 능가하기도 했다. 


오늘날 유럽 최고의 강팀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리버풀 축구팀(Liverpool Football Club)’은 19세기말인 1892년에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그 오래전부터 부두 노동자들이 항구에서의 힘든 노역을 마치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애환을 달래던 정서의 바탕 위에서 탄생한 구단이니만큼 리버풀을 응원하는 지역 팬들의 열정은 다른 팀들과 결코 비교할 바가 아니다. 


따라서 항구도시 리버풀 출신이라는 토니의 자부심은 비틀스와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어가 된 리버풀 축구팀에 대한 애정으로 넘쳐났다.





영국인들은 자기 생각과 판단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토론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의 토론 문화는 어릴 적부터 시작되어 평생을 함께하는 일상이자 습관이다. 따라서 토론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무장하고 상대를 이해하며, 사회나 조직을 평가하는 바탕도 토론 문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민의의 전당인 영국 국회의사당에서는 집권 여당과 야당이 토론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토론은 TV로 영국 전체에 중계되기 때문에 논리가 없고 자질이 부족하거나 금세 드러날 거짓을 일삼는 막무가내식 선동 발언은 그들의 정치생명을 단축하는 지름길이 된다. 의원들은 오랜 시간 훈련한 모습으로 국민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 소신을 주장하고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주기 위해 늘 열심히 공부한다. 


국회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일상에서도 영국 국민은 자기 주관과 주장이 뚜렷하고 자기 철학이 확고하다. 부화뇌동하거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저급한 수준이 드러나는 패거리 행동을 그들은 경멸한다. 몇 해 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반대하는 시위가 영국 곳곳에서 벌어졌는데 나는 군중 속 어딘가에 사이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지난해 엘리자베스 2세(Queen Elizabeth Ⅱ, 1926.4.21.~2022.9.8) 여왕이 9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남편 필립공(Prince Philip)이 두 해 전인 2021년 4월에 먼저 떠나고 19개월이 지난 후에 그녀도 남편을 따라갔다. 그녀는 70년이라는 기간 동안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영국 왕실의 전통을 이어가며 재임 기간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을 시작으로 사망 이틀 전에 임명한 리즈 트러스까지 15명의 총리가 통치하는 영국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1952년 만 25세의 나이에 아버지 조지 6세(George Ⅵ)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왕위에 올라 영국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벌어진 영욕의 현대사를 목격하며 때로는 그 가운데에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조언자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았다.


영국에서 여왕은 어떤 존재로 군림했을까. 

엘리자베스 여왕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기간인 1945년 왕실의 일원으로 군 복무를 위해 여자 국방군에 자원해 보급업무를 지원하고 군용 트럭 운전병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직접 실천했다. 


여왕으로 즉위한 후 그녀가 만난 해외 정상이나 중요 인물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미국 대통령도 13명이 된다. 국제사회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가졌던 인물 중에서 그녀가 만나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는 여왕의 신분으로 영국이 1976년 IMF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 기간, 1990년 발발한 걸프전 등 영국이 관여된 세계사적 사건 속에서 피해를 입은 영국인들을 위로했다. 2011년에는 영국 군주로서는 100년 만에 아일랜드를 공식 방문하여 양국의 아픈 역사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양국의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에는 ‘코로나 19’로 사망하거나 병중에 있는 낙심한 영국 국민을 위해 기자회견에 나서 국민을 위로하였다. 따라서 영국민들은 자신들이 겪는 어려운 순간마다 여왕이라는 존재가 늘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흔히 영국민을 통치하기에 가장 어려운 민족이라고 한다. 개성과 자기주장, 신념이 뚜렷한 민족이라는 게 그 배경이다. 게다가 영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지성주의에 대한 반감이 뿌리 깊다. 이런 국가 구성원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창의성을 계발하기 위한 국가나 사회의 노력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다. 앞에 언급한 사이먼과 토니는 그런 교육을 받고 성장한 영국민 중 한 명으로 영국이라는 국가의 자연스러운 구성원이 된다. 


오랜 기간을 살면서 관찰해 보니 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영국인 전체가 자신만의 독특한 기질과 성향을 개성인 듯 가지고 있었다. 우리 사회처럼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집단의식 속에서 배제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런 문화 속에서 영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고 발전을 지속해 왔다. 





그런 가운데 여왕은 ‘나라의 어른’으로 다양한 성향을 지닌 개성이 넘치고 자의식이 팽배한 국민 간 갈등을 중재하고 봉합하면서 영국은 물론 영연방 전체가 평화롭고 번영하는 국가가 되도록 힘을 기울였다. 나라의 어른인 여왕의 존재는 개개인이 느끼는 갈등과 사회적 이질감에 대한 저항을 다독이는 존재가 되었다.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국가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사람들 마음속에 존재하던 인물인 까닭에 나라의 존경받던 어른인 여왕의 타계로 국민은 좌절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한 달여 후인 2023년 5월 6일, 찰스 3세와 왕비 카밀라의 대관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여전히 다이애너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씁쓸할 수밖에 없고, 찰스의 둘째 아들 해리 왕자가 가족과 함께 스스로 왕실을 떠난 사실을 놓고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왕실에 대한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국내외에 산적한 어려움 속에서 과연 찰스 3세는 자신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만큼의 지도력으로 영국의 통치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국민이 상심하고 좌절에 빠졌을 때 존재감만으로 위로받고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지도력을 갖춘 그런 인물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주변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를 주고받는 대상이라기보다 서로 경쟁하며 반목하는 문화가 팽배한 이 땅에서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가까운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 사람들이니 오죽하랴. 


어린 나이에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극복하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걸고 눈물을 흘리던 피겨의 김연아 선수와 100세를 넘긴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나라의 어른으로 국민을 위해 격려와 덕담을 아끼지 않는 김형석 교수를 두고도 비난하는 남을 헐뜯는 게 타고난 인성인 위인들이 있으니 그런 기대는 차라리 일찍이 접는 게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게 아닐까. 


얼마 전에는 전철 안에서 제 아버지 또래의 어른을 휴대전화기로 머리에서 피가 흐르도록 때리며 욕설을 퍼붓는 젊은 여성의 패륜 행태가 보도되었다.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에 대한 호칭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몰상식한 정치인들도 부지기수다. 


오랜 기간 나라의 어른이었던 여왕을 떠나보내는 수많은 영국인들의 애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갈등과 대립, 충돌과 혼돈이 팽배한 우리나라에 존재감만으로 국민이 위로받게 될 인물의 등장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렵기는 하겠지만 불가능하기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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