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런던 남서쪽 방향으로 가는 동안 바깥으로 보이는 도시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하루에 사계절을 경험한다는 말처럼 계절은 이미 봄이 찾아왔지만 바람은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로 거셌고, 어두운 길거리 조명 아래 잔잔하게 내리는 비는 마치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처럼 스산했다.
주말 늦은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한산했고 드물게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걸음걸이는 웃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그저 무덤덤하다. 영국인들이 유머에 쉽게 감동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예전에 머릿속에 남아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런던은 여전히 겨울의 끝자락을 벗어나지 못한 채 비에 젖은 뒹구는 낙엽은 여전히 길가 곳곳에 남아있었다.
긴 시간이 흐른 후에 런던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청년기에 오랜 시절을 보낸 곳이고 영국이라는 나라를 전공으로 한 탓에 예전에는 2~3년 주기로 방문을 하곤 했지만, 갑자기 코로나 사태가 발생해서 본의 아니게 이번에 방문 기회를 얻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린 셈이 되었다.
그새 많은 일이 영국에서 벌어졌다.
오랜 기간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었던 영국이 유럽 시장의 문을 박차고 나왔고, 코로나 사태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는가 하면, 지난해에는 70년간 영국을 통치하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타계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열광적인 축구팬들은 지난 카타르 월드컵 경기에서 영국이 프랑스에 패배한 사실에 분노했고, 전통 술집인 펍(Pub)은 코로나 방역 해제 이후 자유를 되찾은 시민들로 붐볐으며, 해리 왕자가 스스로 왕실을 떠난 것을 놓고 다이애나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
유럽연합(EU)을 탈퇴한 브렉시트(Brexit)로 영국의 경제 상황은 예상과 달리 침체상태에 놓여 있는데, ‘Covid 19’와 지난해 이 무렵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원유와 가스, 그리고 식량 가격의 급등은 영국 경제를 더욱 심각한 상태에 빠지게 했다.
지금 영국인들은 높은 세금과 물가, 그리고 얼마나 더 내핍생활을 하며 견뎌야 하는지를 놓고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경제 상황으로 인해 모두 우울해 보인다.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은 많은 영국 사람들을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으며 그녀의 부재 이후 나라에 왜 어른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영국 정치를 이끌고 있는 집권 여당인 보수당은 연이은 총리들의 낙마로 난국을 헤쳐나가야 하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브렉시트를 이끈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총리가 브렉시트의 여파와 ‘파티 게이트’ 논란으로 사임하였고, 그 뒤를 이은 리즈 트러스(Liz Truss)는 엘리자베스 2세 시대의 마지막 총리이자 찰스 3세 시대의 첫 총리로 영국 역사상 3번째 여성 총리이자 40대 여성으로서 총리가 된 최초의 인물이라는 진기록 속에 등장했지만, 통화정책의 실패로 취임 50일 만에 사의를 표명하면서 최단임 총리라는 불명예를 얻으며 퇴진하였다. 취임 당시 그녀의 자신만만함을 믿고 영국의 미래에 희망을 품었던 시민들은 허무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2022년 10월 25일에 취임한 인도 출신의 리시 수낵(Rishi Sunak)이 79대 총리로 선출되어 영국을 이끌고 있다. 수낵 총리의 선출은 영국은 물론 영연방 국가들과 미국, 유럽을 포함한 국제사회 모두를 놀라게 한 엄청난 정치적 사건으로 영국 역사에 기록될 만하다.
수낵은 인도계로 1960년대 영국으로 이주한 부모 밑에서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출생하였으며 명문 윈체스터 컬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MBA 코스를 마친 금융 전문가이다. 힌두교도인 그는 영국 역사상 백인이 아닌 첫 총리이자 42세의 나이에 단독 출마하여 무투표로 당선된 최연소 총리이기도 하다. (그는 42세에 취임하여 1812~1827 기간 재임했던 로버트 젠킨슨(Robert Jenkinson) 이후 210년 만의 최연소 총리이다).
비록 젊은 나이이지만 수낵은 테리사 메이(Theresa May) 내각에서는 주택·지역사회·지방자치부 차관에 발탁되었고, 보리스 존슨 전 총리 밑에서는 재무부 수석 차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스스로를 상식적 대처주의자로 소개하면서 보수적이면서 실용적이고 합리적 관리자의 성향을 지닌 인물로 영국 사회에서 평가받고 있는 그가 미·중 시대에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유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가져온 외교 안보적 현안, 유럽연합(EU) 특히 독일 프랑스와의 협력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침체해 있는 경제문제의 해결 등 산적해 있는 수많은 난제를 풀고 영국을 침체상태에서 구해낼 수 있는지가 그가 이끄는 영국의 현재를 관찰하는 관점이 될 것이다. 게다가 교육, 복지, 의료, 이민, 범죄 등 사회 내부의 갈등문제도 그의 내각이 해결해야 할 직면한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흔히 영국을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은 영국 사회를 바라보면서 조상을 잘 둔 덕분에 후손인 오늘의 영국인들이 저렇게나마 살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사실상 해외에서 약탈해 온 수많은 귀중품을 바라보면서, 또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영국을 찾는 전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에 대한 인식과 지식은 현재보다는 과거에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런 평가나 지적 또한 틀린 게 아니다. 과거에 수많은 전쟁을 경험하면서 화려한 외양을 지양하고 내핍에 익숙해 있는 평범한 일반 국민의 삶을 보면서 과거와 현재가 대비되는 상반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우리처럼 특별히 풍요로운 자원 없이 열악한 지정학적 여건 속에서 민주주의를 탄생시키고 오랜 기간을 실천해 오면서 그들 사회 내부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가치에 주목하는 것을 외면해서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발전한 공업 분야에서 제조한 상품과 생산물을 일찍이 해양으로 진출하면서 획득한 해외영토인 지역에 수출하고 거기서 획득한 원료와 자재를 또다시 가공하여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경제발전의 모델도 영국을 빼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들은 마침내 대영제국을 거느리면서 국제사회를 운영하는 경험을 통해 다른 국가들에 선례가 되는 역사적 사명을 (그것이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 인식이든) 기꺼이 수행한 바 있다.
비록 소매가 닳아 너덜너덜해진 스웨터 셔츠를 해가 바뀌도록 입고 청바지도 구멍이 날 때까지 입고 다니는 청년이지만 성년이 되자마자 그들은 심지어 부모의 도움을 포함해서 남의 신세를 지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영역에서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 독립적 사고에 몰두하면서 끝없는 자기 혁신과 발전을 꾀한다. 식사도 필요한 만큼만 하고 귀중한 청년 시절을 허비하게 되는 불필요한 사회활동도 자제한다.
엄청난 독서와 과중한 학업,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늘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자신 삶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인식만큼은 분명했다. 오래전 캠퍼스에서 이런 모습의 친구들을 보는 게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는데 오늘 오랜만에 다시 찾아본 대학 도서관 주변의 젊은이들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이번에 큰 희망을 보았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옆에 앉았던 두 명의 우리나라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모르는 사이인 그들 둘 다 영국에 처음 공부하러 오는 길이라고 했다. 말 설은 낯선 나라에서 앞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겠다고 결심한 그들을 보면서 오래전 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마음이 짠했다.
힘겹게 큰 가방을 끌고 작은 배낭은 등에 메고 조금은 두렵고 상기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고 공항 밖으로 씩씩하게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으로부터 큰 격려를 보냈다.
이들이 오래전 영국인들이 지금처럼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칠고 황량한 환경 속에서 제국을 이루었듯이 우리 젊은이들도 영국이라는 사회를 철저히 이해하고 배워서 나라의 더 큰 성장을 도모하는 데 이바지하게 되길 바란다.
그들의 부모 세대가 열악한 여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머리보다는 몸으로 부딪쳐 가며 이룩해 낸 경제 선진국의 면모를 이제는 선진국의 또래들과 머리와 지혜로 경쟁해 가며 훌륭한 나라로 발전하는 데 그들의 기여가 있기를 기대한다.
밤새 불던 비바람이 여명이 채 가시기 전인 어둠이 짙게 깔린 지금까지 여전하다. 창밖으로 큰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이 불안해 보인다.
비바람은 영국을 유럽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져온 엘리자베스 1세 때나, 대영제국을 이룩한 빅토리아 여왕의 시기에, 그리고 흔들리는 촛불 아래에서 열정적인 집필을 통해 전 세계에 영국의 문화를 전파한 셰익스피어나 디킨스의 시기에, 그리고 전쟁과 경제적 쇠퇴라는 위기와 수렁 속에서 영국을 이끈 처칠이나 대처 전 총리들이 평범한 시민들을 격려하고 피와 땀을 호소할 때도 불었을 것이다.
영국은 앞으로 어떤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될까?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할까? 땅속 깊숙이 뿌리내린 큰 나무들처럼 강풍의 흔들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 어려움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비록 짧은 체류 기간이지만 그 답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볼 참이다.
미국의 그래미상보다 영국의 ‘Brit Awards’상 수상이 더 감격스러웠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노래하는 런던 토트넘 출신의 세계적인 가수 아델(Adel)의 노래를 들으며. 그리고 강한 비바람이 이방인을 기다려줄 것 같지 않은 날씨 속에 런던 거리를 산책하면서, 또 잉글리시 티(English tea)도 종종 마셔가며 답을 찾기 위한 고민을 해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