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람들에게 겨울은 눈(雪)을 빼놓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일본 소설에서는 눈을 배경을 한 작품들이 의외로 많다. 대표적으로 일본인 최초로 196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상작 제목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설국(雪國)》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지역은 일본에서도 겨울에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니가타현이다.
니가타현 못지않게 다설(多雪)로 유명한 지역이 또 한 곳이 있다. 홋카이도 지방이 바로 그곳이다. 거기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작가가 있다. 미우라 아야코. 가와바타가 설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홋카이도 출신의 미우라 아야코도 자신의 많은 작품에서 고향 마을 아사히카와시의 잔잔한, 그리고 때로는 퍼붓는 백설을 놓치지 않았다. 작품의 내용은 비록 다르지만 어의로 겨울을 느끼게 하는 걸출한 그녀의 작품이 저 유명한 《빙점(氷點)》이다.
한겨울 홋카이도를 여행하며 퍼붓듯이 쏟아지는 눈을 제대로 경험했다. 겨울이 되면 멀리 시베리아로부터 매섭고 찬바람이 동해의 습기를 가득 머금고 일본으로 건너온다. 긴 여행 탓일까? 산을 쉽게 넘지 못한 습기는 등성이에 부딪혀 눈이 되어 내린다. 눈은 겨울 내내 머물기라도 하려는지 끊임없이 내렸다. 당장 위내시경을 해도 무방할 만큼 여행객들의 허기진 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는 눈이 쌓인 홋카이도의 길고도 먼 길을 지루하게 달렸다.
차가운 북해도 시내 거리와 긴 외곽 시골길 이곳저곳을 오가며 오랜만에 손이 시린 아득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한겨울 추위 속 학교 운동장이나 동네 골목길에서 뛰놀 때면 아플 만큼 손가락이 시린 적이 종종 있었다.
깊은 겨울에 끝없이 쏟아지는 수분을 가득 품은 눈은 삿포로를 방문한 여행객들에게는 천혜의 겨울 정취와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같은 곳에서 보낸 홋카이도 주민들에게는 신이 주는 두렵고 장엄한 거절하기 어려운 선물이 되겠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늘 그랬다는 듯이 홋카이도에 머물고 있는 기간에도 눈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무심하게 내렸다. 비처럼 눈이 쏟아지는 날도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마치 눈의 감옥에 갇힌 날의 느낌이었다.
그날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람에 눈보라가 더해졌다.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그녀의 나라가 조선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이었는지조차 낯설어했다고 했다. 눈보라가 세차게 얼굴에 부딪치는 차가운 추위 속, 나는 가련한 여인의 슬픈 얘기를 가미카와군 비에이강의 흰 수염 폭포가 한겨울에도 물줄기를 쏟아내는 계곡 어디쯤에선가 귓가를 휘익 지나치는 바람으로부터 들었다. 휘몰아치는 눈으로 바람이 들려주던 소리는 웅얼거리는 소리로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푸석하고 수척해진 마른 얼굴을 한쪽 다리 위에 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눈은 바람 하고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녀는 엄지 손가락만 한 조약돌 한 개를 살며시 들었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늦은 밤 흐린 등불 아래에서도 돌은 윤기를 냈다. 그리곤 멀리 보이는 돌담 벽에 무수히 붙어있는 조약돌 무리를 가리키며 저 숫자만큼 많은 일본 군인을 몸으로 받았다고 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울음은 이겨냈다.
홋카이도는 도쿄에서도 약 1,500km쯤 떨어진 거리, 다른 일본의 중심인 간사이 지방의 오사카나 교토 등과도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이다. 남쪽의 오키나와나 북쪽의 홋카이도 지역은 일본 본토 거주민의 눈에 오랜 기간 이민족으로 여겨져 왔다. ‘아이누’와 ‘류큐’라고 불리는 별개의 호칭이 그들의 속내를 여실히 드러낸다.
어머니 나라의 말을 하는 사람을 피해 먼 곳으로 숨어드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긴 세월을 살면서 그녀는 한국말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그녀는 병든 자신을 돌봐주던 마음 따뜻한 타국인에게 감사했다. 바람은 반짝이는 조약돌 하나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녀는 한겨울 홋카이도를 덮은 눈이었다고 바람은 말해주었다.
그녀는 북해도에서 평생 고통스러웠던 신이 준 수명을 다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었으므로 무연고가 된 그녀의 시신은 규칙대로 화장되어 한 줌의 재로 뿌려졌다. 재조차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흩어졌는지 아는 이가 없다. 가엾은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집에서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와바타는 《설국》에서 ‘인간관계라는 것은 결국 차갑고 비정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작품은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지만 그녀를 품은 홋카이도의 볼을 에는 차가운 바람과 산과 계곡과 들판에 쌓인 눈은 그 의미를 이해할는지 모르겠다.
겨울 일본을 방문하기 전, 눈 덮인 홋카이도를 상상할 때마다 이와이 슌지의 소설을 영상화한 영화 러브레터의 주인공을 생각했다. 영화 말미에 그녀가 눈 덮인 오타루 설원을 바라보며 가녀린 목소리로 사랑했던 사람을 애타게 부르며 안부를 물었던 장면이 기억이 났다.
어린 나이에 끌려가듯이 고향과 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그녀는 먼 이국땅 홋카이도에서 마지막 순간에 누구를 애타게 불렀을까.
귀국하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할머니의 이야기를 지나가듯 들려준 홋카이도의 차가운 겨울바람을 다시 느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홋카이도의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한국 할머니, 잘 계신가요?’
그녀가 고향의 말인 내 목소리를 홋카이도의 세찬 눈바람 속에서 구별하셨기를 간절히 바란다.
백성의 고통을 막지 못하는 군주는 무슨 면목으로 백성으로부터 대접을 원할까.
자료에 따르면 2차 대전 기간 한국에서 끌려간 한 명의 위안부는 부대 내 병사 70~150명 비율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일주일에 한 번 위안소를 이용하도록 허가되었으므로 부대의 규모에 따라 한국인 위안부는 하루에 약 15명 전후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장교나 하사관들은 매일 이용을 허락받았고, 다음날 전투가 예정된 경우에는 특별 허가에 따라 위안부 앞에 긴 행렬이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70명 이상의 병사를 상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본격화된 1938년부터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종료된 시점까지 동원된 한국인 위안부는 약 6만 명에서 12만 명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자료는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와 호사카 유지의 《신 친일파》 책자에서 각자의 주장을 인용한 숫자임).